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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002+AKS-AA25_20191_001_0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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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명 : 대동유사 (大東遺事v1)


(高句麗琉璃王)


琉璃王名類利東明太子元年壬寅漢成帝鴻嘉二年(初)朱蒙在東扶餘時娶禮氏

▼원문보기9b  처음으로
有娠而朱蒙出奔禮氏後生男名類利有奇絶善彈丸嘗出遊彈雀誤中汲婦
[주:彈汲盆]之盆婦怒曰無父之兒其頑如此類利彈泥而塞之歸問其母曰我父何人也母曰汝
父非常人也不容於國避難歸南地開國稱王歸時謂余曰有物藏在於七嶺七
谷石上松下得此來者是吾兒也類利聞是言卽往遍索於山谷而不得一日忽
聞柱礎間有聲就而視之石上有七稜乃自解曰七嶺者七稜也石上松者柱
也乃搜柱下得斷劍遂持至卒本朱蒙出其所藏斷劍而合之果然符驗大
喜乃立以爲太子是爲琉璃王乃移都于國內城[주:今遼東境]



기사메타
인명: 유리왕(琉璃王)[~18]아버지인 동명성왕을 찾고 왕이 됨UCI 연결
시점: 중국의 왕망(王莽)이 흉노를 정벌하기 위하여 고구려 군사의 출동을 요구하였으나 유리왕이 거부함[()~12()]
유리왕이 부여의 침입을 막아냄[()~13()]

요약해설
고구려 제2대왕이다. 이름은 유리(類利)이며 동명왕의 태자이다. 유리왕이 아버지를 찾아가서 왕이 되는 과정을 기술하였으며, 동명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도읍을 국내성으로 옮긴 일을 전한다. 유리왕 12년에는 중국의 왕망(王莽)이 흉노를 정벌하기 위하여 고구려에 군사의 출동을 요구하였으나 이를 거부하였다. 한(漢)나라를 공격하자 왕망은 유리왕을 ‘하구려후(下句麗侯)’라고 비칭(卑稱)하였다. 13년에 부여가 침범하였으나 대패시켰으며, 이듬해에는 양맥(梁貊)을 쳐서 멸망시키고 한(漢)나라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빼앗았다. 18년 두곡리궁(豆谷離宮)에서 죽었다. 두곡동원(豆谷東原)에 장사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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