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란때 순절한 조영규의 충효 일화   
 
 G002+AKS-UR20_Q_2575_1_01A
 [음성통합상세화면]
제목 임진란때 순절한 조영규의 충효 일화
테잎연번 [북이면 설화 5]
음성위치  T. 북이 2 앞
채록지  조양리
채록자  최내옥, 김균태, 구영희, 이광수 조사
구연자  김병효
출전  한국구비문학대계 6집 8책
출전페이지  263 ~  266
설명   * 효자 이야기가 나오다가 조사자가 그 이야기 좀 해달라고 하자 해 준 것이다. 이 이야기는 어려서부터 들은 것으로 장성군내에 다 알고 있는 이야기라 한다. 차분한 목소리로 구술하여 주었다. *
본문 
조정로 선생은 그때 그 양산 군수로 있었던 조…. 보통 우리가 조양산이라고도 여기서는 부르고 있어요. 그 분의 정묘가 참 우리 고장 북이면이라는 데가 있는데, 그 바로 고창과 경계하는 그 산이 방장산이라고 불러+ 요. 그 방장산에 밑에 그 백암리라고 있어요. 그 백암리 마을에 그 고창으로 가는 지방도 가에 그 정묘가 있어요. 그 정묘에 조양산 조영규, 조영규라 허는 그분이 조정로 그분의 아버지입니다. 그런디 조정로 얘기를 헐라면은 조영규 그 조군수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조양산 군수, 그 양, 경상남도에 그 양산이란디가 있어요. 거기 그 양산에 군수를 했다고 해서 여기서는 조양산 혹해는 인자 조군수 이렇게 불리고 있읍니다.

그분이 아주 청념 결백한 관리였대요. 그래서 그 분이 경상남도 양산에 가서 군수허고 있는 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가지고, 그때 그 진주성이 무너지고 또 그때 그 석성 그 근처에 그 산성에 들어가, 그때 그 싸움을 헐때에 맨손으로 적과 싸워서 희생한 그런 분이여. 그런디 그 분이 그렇게 벼슬로서도 나라에 충성을 다했고 또 싸움에서 관군 못지 않고 싸움에도 크게 전사를 했고 그래 그랬는데, 그 아들은, 그 아들은 보통 재간으로 해서 아버지의 시체를 찾을라고, 그 뭐라면 싸웠던 디에 가 가서 그 시체를 찾다가 결국은 시체를 못찾고 돌아왔어요.

돌아오, 돌아와가지고 하도 원통하니까 그 혼을 불러다가 장사를 지냈는


[264 쪽]

디. 그러고서는 그 장사를 지냈는디, 그 장사 지낸 저의 산에 가서 그 산 속에서 삼년 시묘살이를 했다고 헙니다. 삼년 시묘살이를 허면서 그 많은 인자 고생을 허고 그러고도 집에 돌아와서는, 옛날이는 그것보고 방립이라고 허지. 삿갓요. 삿갓요. 커… 커다랗고 삿갓. 그러고서는 평상소[주](평상시)에 방립을 벗지 않았다고 그래요. 허다못해 그 헛간, 헛간에만 가더라도 방립을 썼다고 합니다.

ꡒ평생 그 방립을 쓰는 이유는 무엇이냐?ꡓ

ꡒ나는 부모의 그 시체를 제대로 찾아서 모시지 못한 불효자식이 감히 어떻게 하늘을 보겠는가!ꡓ

그래서 평생을 인자 하늘을 보지 않고 살았다. 그리고서는 그분의 그 자기 아버지가 지체도 높으신 벼슬을 허고 그랬으니까, 그 재산도 안많았겠읍니까?

ꡒ그 서울에 가서 서울 집이 있으니까 그집을 팔아다가 편히 살지, 왜 그렇게 그 궁상스럽게 허느냐?ꡓ

그렇게 옆에 사람이 지침[주](忠告)을 해 주니까, 기침

ꡒ내가 아버님의 시체도 제대로 모시지 못한 불효자다. 무슨 면목으로. 무슨 면목으로 아버지 재산을 내가 팔어다가 편히 살 수가 있겠느냐?ꡓ

고. 그러면서 돌아보지도 안했다고 그래요. 그런게 평생 그 갓도 아주 험하게, 일부러 일부러 그렇게,

ꡒ나는 불효자가 되니까 밥도 잘 먹어서는 안된다. 옷도 잘 입으면 안된다. 말도 남과 조심스럽게 해야 되고.ꡓ

항상 그 행동을 삼가했다고 합니다. 그러한 그 효성이 지극하다는 이야기가 저기 궁중에까지 들어가게 돼서 임금님이,

ꡒ효자로 정묘[주](旌門)를 세워 주라.ꡓ

이렇게 정려(旌閭)하고, 그 정려를 관리하고 이랬다는 그 논을 있어요. 그 아버이 아버지에 대해서 얘기 좀 해 주세요. 그 아버님이 어떻게 청렴한 관리였냐면, 소위 옛날에 그 원을 했으니까 원은 군수 아닙니까?


[265 쪽]

그런디 고관리(高官吏)이지요. 그런디도 집에 오면은 아주 집도 험하거니와 집에 그 어매한테도, 그 친모가 아 오랫만에 그 아들이 오면은 반가워허면서 걱정을 했다고 그래요. 우선 끓여줄 쌀이 없으니까. 그래 그 아들이 인제 오면은 그 어머니가 반가워허며 밖에 나가면,

ꡒ어머니 뭐드러, 무엇 얻으러 나가냐?ꡓ

허면은,

ꡒ아니여, 나 밖에 일이 있어, 일이 있어서 좀 갔다 온다.ꡓ

고. 그러면서 쌀을 꾸러 다녔다고 그럽니다. 꿔온 그 쌀을 갖다가도 밥도 못해 주고 죽을 쒀서 참 대접을 해 주었다고 그래요. 그러니까 그 어머니가 양식이 없다고 투정을 부린다거나 그런, 그 참 죽만을 끓여주었다고 헙니다. 그렇게 아주 청렴헌 관리였답니다. 인자 그런데 그러면서도 항상 자기 재산 어머니를 물질로써 돕지를 안했다고 그래요. 그런데 항상 그 객지 가서 있으면서 어머니를 생각허고 이 집안일을 걱정을 했는데, 그래 한 번은, 그러니까 거기가 어디쯤 될까요. 경기도 무슨 원이었는데, 거기서 그 원노릇을 허면서 고향에 있는 어머니 그 소식이 궁금허니까 그 집에서 기르는 개를 보고 편지를 써주면서, 인자 마당바닥에 지도를 대강 그려주면서,

ꡒ너 이 편지 고향에 전할 수 있겠느냐?ꡓ

물으니까 아 그 개가 고개를 까닥 까닥 거려요. 그러고서 개의 목에다가 편지를 쭴매 주면서,

ꡒ가서 전하라.ꡓ

고. 그 개가 고향 찾아가는디. 그 개가 아 발이 셋여. 셋. 에 발이 인자 보통꺼는 넷 아닌가. 그런디 발이 셋여. 그래서 그 개를 삼쪽구[주](三足狗)라. 삼족구요. 그래 발이 셋인 개다. 그래서 삼족구로 그렇게 부른다고 그래. 그래 삼족구가 아 몇일 있으니까 고향을 가서 그 편지를 전하고 그 답장을 받아갖고 왔어. 그래서 편지허고 응. 그 기이헌 그러한 이야기가 퍼져가지고 그것을 고사허고 효자로도 이름이 났다고 그런 얘기도 했어.


[266 쪽]

그때 그 임진왜란을 만나가지고 그 목숨을 다해서 싸운 그런 일이 때문에 그 일을 조, 조 장군이라고 또 그렇게 이름하기도 합니다. 조 장군요. 응, 조장군. 본래는 아주 심도 좋고 용기도 있고 또 어렸을 때부터 장군이 되는 것을 꿈을 꾀였다고 그래요. 조장군이요. 그 아래 말씀드린 양산 군수. 그 조장군이라는 이이는 어렸을 때 부터 그 싸움 놀이를 좋아하고 활 솜씨 이런 칼놀이, 그런 것을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런디 결국은 그 분은 그런[주](武官) 목적인 것 보다도 문쪽[주](文官)으로 해서 원을 오래 살았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선조25년 쯤 될거요. 그 경상도 그 양산에 가서 원이 되었어요.

그때 그 왜적들이 갑작기 쳐들어 오니까 무서와가지고 그 고장을 지켜야 할, 고장을 지켜야 할 그 병사라고 허는 사람은 도망을 가버렸다고 그래요.

그래서 그 분이 동래부사 그 송상현을 찾아 가가지고 그때 그 옆에 동래, 고기 있었지요. 그 동래 부사 그 송상현을 찾아가가지고,

ꡒ나라가 이렇게 위태로운데 어떻게 헐 것이냐?ꡓ

그래갖고는 그 송상헌 부사허고 손목을 잡고,

ꡒ기여코 우리는 여기서 죽드라도 이 곳을 지키자.ꡓ

그래가지고 거기서 그 왜적과 끝까지 싸우다가 그 송상현 그분도,

ꡒ결국 활에 죽는 것보다 차라리 우리는 저기 강에 가서 자 자결허자.ꡓ

고 그러니까. 여기 조 군수는,

ꡒ한 사람이라도 왜적을 죽이고 그러고 죽자.ꡓ

그래가지고 끝까지 싸워가지고 둘다 전사를 했다, 그런 얘기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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