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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한국사 기초사전 > 유형별보기 >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
G002+AKS-CC11_Z0001492
항목명(한자) 육군주만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
소표제 정의/설립경위/조직 및 활동사항/해체
주제어 무장독립운동/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혁신의회
성격1 단체
성격2 독립운동
시대 근대
초기구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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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23년 9월 만주에서 조직된 대한민국임시정부 군무부 산하의 무장독립운동단체.
설립경위 남만주 무장독립운동단체의 통합기관인 대한통의부가 1923년 들어 잇따른 내분으로 분열되자, 독립운동단체의 지도자들은 임시정부의 직할부대를 편성하여 재만독립군의 재통합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 일환으로 백광운(白狂雲)조능식(趙能植)박응백(朴應伯)김원상(金元常)조태빈(趙泰賓) 등이 임시정부와의 교섭을 위하여 상해에 파견되었다. 임시정부는 이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전에 설립된 광복군사령부의 전통을 계승한 임시정부 직속의 남만군(南滿軍)정부를 인정하고 정식명칭을 대한민국임시정부육군주만참의부로 하였다.
조직 및 활동사항 이런 과정 끝에 참의부는 1923년 9월에 정식으로 발족하였고, 집안(集安)•무송(撫松)•장백(長白)•안도(安圖)•통화(通化)•유화(柳化)의 각 현에 거주하는 동포사회를 관할하는 한편 항일전을 전개하는 중심체역할을 맡았다. 부대편성과 주요 지도자로는 참의장 겸 제1∼5중대장으로 각각 백광운•최석순(崔碩淳)최지풍(崔志豊)김창빈(金昌彬)김창천(金蒼天)을 임명하였고, 독립소대장 허운기(許雲起), 훈련대장 박응백, 중앙의회의장 백시관(白時觀), 민사부장 김소하(金筱廈) 등이었다. 부서를 보면 민사조직보다 군사조직이 중시되었으나 민사부의 관할구역은 13개 지방행정구로 나누어져 주로 독립군자금을 모으는 기능을 수행하였다. 1924년 참의장 백광운이 피살당하자 제2중대장 최석순이 참의장을 겸임하였다. 1925년 고마령(古馬嶺)에서 간부회의 중 일본군경의 기습을 받아 간부 29명이 몰사당하는 불운도 겪었다. 특히 미쓰야협정[三矢協定]이 체결되어 일본과 중국이 독립군의 활동을 견제함에 따라 조직을 재편성하여 전력을 강화하는 방안을 마련하였다. 개편된 조직체계에서 윤세용(尹世茸)이 참의장에 선임되었으며, 조직도 경무•교통•사법•학무•군법•재무•외무•군수로 다양화하여 각 부에 주임을 두었다. 소속된 독립군도 박응백을 사령장으로 선임하여 5개 중대를 통솔할 수 있게 만들었다. 참의장 윤세용이 1927년에 사임하자 김승학(金承學)이 선임되고 군사위원장 마창덕(馬昌德), 민사위원장 김소하, 재무위원장 한의제(韓義濟), 교육위원장 양기하(梁基瑕), 중앙의회의장 백시관 등으로 조직을 다시 개편한 바 있다. 참의부의 항일독립군 활동은 다른 어느 단체보다 활발하였으며, 특히 1924년에는 가장 두드러진 활동을 벌였다. 이 시기 국내에서 전개된 독립군의 활동 중 2/3 이상이 참의부 독립군에 의한 것이었다. 대표적인 활동분야로 일본 군경 습격, 일제통치기관 파괴, 친일파 숙정, 군자금모금 등 각 방면에 걸쳐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특히 5월 19일 총독 사이토[齋藤實]가 국경지방의 치안을 시찰한다는 명목으로 경비정에 승선하여 압록강 하류로 내려오는 것을 기습, 공격한 것은 당시 독립군의 정신을 널리 알린 쾌거였다. 1925년 3월 전부대가 3대로 나뉘어 평안북도 초산방면으로 출동, 추동과 하단동의 경찰관주재소, 벽동군의 여해경찰관주재소를 습격, 파괴하고 이어 국경수비대와 교전하여 그 용맹을 과시하였다.
해체 그러나 참의부는 1925년 후반부터 그 세력이 위축되었고, 1928년 3부 통합운동의 결과를 태동한 혁신의회가 구성되자 참의장 김승학이 이에 참여하면서 해체를 선언하였다. 1929년 국민부(國民府)가 결성되자 참의부의 심용준(沈龍俊)계열은 이에 참여함으로써 대다수의 단원이 다른 단체로 빠져나갔다. 이후 김소하가 참의부를 끌고 오다가 10월 19일 일본경찰에 붙잡힘으로써 참의부는 해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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