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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ME > 한국사 기초사전 > 유형별보기 > 최명길(崔鳴吉)
G002+AKS-CC11_C0000247
항목명(한자) 최명길(崔鳴吉)
소표제 정의/가계/활동사항/업적
주제어 척화론/강화론/주화론/양명학/강화학파
성격1 인물
성격2 문신
시대 조선
생몰년 1586(선조 19)∼1647(인조 25)
본관 전주(全州)
자겸(子謙)
지천(遲川)/창랑(滄浪)
시호 문충(文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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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586(선조 19)∼1647(인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창랑(滄浪). 할아버지는 최수준(崔秀俊)이고, 아버지는 영흥부사 최기남(崔起南)이며, 어머니는 참판 유영립(柳永立)의 딸이다. [[이항복(李恒福);과 신흠(申欽)에게 배웠고 조익(趙翼)장유(張維)이시백(李時白) 등과 교유하였다.
활동사항 1605년(선조 38) 생원시와 진사시에 동시에 합격하였고, 같은해 증광문과에도 병과로 급제하였다. 성균관전적을 거쳐 1611년(광해군 3) 이후 공조좌랑에 재임하다가 1614년 물러났다. 북인의 전횡이 선조의 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 유폐에까지 이르자 1623년 인조반정에 참여하여 이조참판에 오르고, 정사공신으로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봉해졌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후금과의 강화를 주장하여 화의를 맺게 하였지만 많은 지탄을 받았다. 그후 예조•이조•호조의 판서와 예문관홍문관 대제학을 역임하였고, 1936년 이조판서가 되어 병자호란 당시 척화론 일색의 조정에서 홀로 강화론을 펴 극렬한 비난을 받았다. 1637년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이듬해에는 영의정에 올라, 대청•대명 외교의 복잡한 문제를 처리하고 개혁을 추진하면서 국정을 주도하였다. 1640년 사임하였다가 1642년 다시 영의정이 되었지만, 임경업(林慶業)을 통해 명과 비공식적 외교관계를 유지한 일이 드러나 청에 압송되었다. 1645년 소현세자 일행과 함께 풀려나 인조를 보필하다가 죽었다.
업적 성리학과 문장에도 뛰어났고, 글씨도 잘 써 동기창체(董其昌體)로 이름이 있었다. 그는 신유학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양명학(陽明學)을 수학하여 친구인 장유와 손자인 최석정(崔錫鼎) 등과 더불어 강화학파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양명학에 영향을 받은 그의 사상은 실제 생활과 정치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정절을 중시하던 시대에 청군에 끌려갔던 부녀자들의 혼인관계가 계속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늦게 아들을 얻었으나 그 전에 양자로 삼은 조카가 후사가 될 수 있도록 탄원서를 제출하여 허락을 받았다. 주화론으로 대표되는 그의 사상과 정책은 성리학적 명분을 중시하던 시대에 부정되고 소인배로 폄하되었지만, 현실을 도외시하지 않고 국가와 민생을 위해 헌신했던 공로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도 계속되었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손자이자 숙종대에 영의정을 지낸 소론의 지도자 최석정(崔錫鼎) 등을 통해 후대로 이어졌다. 문집으로 ≪지천집(遲川集)≫과 ≪지천주차(遲川奏箚)≫가 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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