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유록(臥遊錄 解題)

G002+AKS-AA55_24513_000
해제작성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작성일2007-11-30
내용시대미상
언어국한문 혼용
간행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초록

【정의】

고려 시대부터 조선 중기까지의 산수 유람에 대한 시문을 모은 책.

【서지사항】

12卷의 筆寫本 唯一本으로, 藏書閣에 소장되어 있다. 四周單邊. 半郭 23.3×16.2cm. 烏絲欄. 半葉 11行 24字. 雙行註. 책 크기 31.5×20cm의 楮紙로 된 綿裝本. 表題가 “臥遊錄”으로 되어 있고, ‘李東景印‘, ‘李王家圖書之章‘의 장서인이 매권 첫 장에 찍혀 있다.

【체제 및 내용】

편찬자는 알 수 없으나 17세기 중반까지의 자료만 수록되어 있어, 17세기 중반 山水癖이 있던 사람이 편찬한 책으로 추정된다. 문집 등의 자료에서 取擇하여 편찬하였으며, 원자료의 주석도 대부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원자료에서 遊記와 遊山詩가 따로 편집되어 있는 것을 이 책에서는 한꺼번에 보기 쉽도록 합쳐 놓기도 하였다.
臥遊錄』은 대부분의 개별 작품 아래 필자를 밝혀 놓고 있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는 필사자가 알지 못하여 빠뜨린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失名”으로 되어 있는 작품이 있는데, 이는 許筠이 역모로 사형당하였기에 忌諱한 것으로 보인다. 저자를 확인하기 어려운 자료도 있는데, 자료 자체가 기존의 문헌에 보이지 않는 逸文이다.
자료의 배열 순서는 매우 무질서하다. 각 卷 안에서는 필자의 생존시기순으로 배열하였지만, 卷을 나눈 기준은 알 수 없다. 부분적인 착간도 보인다. [遊頭流錄](金宗直)의 19면부터 실려 있는 것은 [續頭流錄](金馹孫)의 것이 착간된 것이며, [遊頭流錄]의 19면부터이어지는 내용은 許穆의 [泛海錄] 뒷부분에 잘못 실려 있다. 필사본에 이와 같은 착간이 생긴 것은 제본 과정에서 실수하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奎章閣에도 筆寫本 7冊의 『臥遊錄』이 전하는데, 기본적인 성격만 같을 뿐 그 체제나 수록 자료는 다르다. 장서각본 『臥遊錄』은 필자의 신분과 시대, 성향이 매우 다양하지만, 규장각본 『臥遊錄』은 대체로 조선 중기 이후 老論들이 남긴 遊山 기록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유람 지역에서도 장서각본은 전국의 명산과 해외까지 미치고 있지만 규장각본은 松都와 關東, 關北만 실려 있어 장서각본이 더욱 온전한 체계를 갖추고 있다. 또 장서각본은 遊山詩와 贈序類, 稗說類 등 다양한 문체로 된 것을 수록하고 있음에 비하여, 규장각본은 山水遊記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조선 중기까지는 중복된 작품들도 있지만, 후기 것은 중복되지 않으므로 장서각본과 규장각본을 합치면 더욱 온전한 ‘臥遊錄‘이 될 수 있다.
‘臥遊‘는 『宋史·宗炳傳』에서 유래하는 용어로서 산수화로 유람을 대신한다는 뜻이며, 흔히 매우 생동감 있는 遊記나 圖畵, 기록 등을 일컫는다. 따라서 ‘臥遊錄‘은 해당 산수를 직접 유람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대리 충족의 기회를 주거나, 노년의 위안거리로 삼겠다는 목적이 우선 내포된 이름이라 하겠다. 이러한 산수 유람의 기록은 다른 이의 유람에 길잡이로, 새로운 유람 기록의 창작에 참고서로 역할을 하였다. 조선후기의 金昌翕(1653∼1722)은 금강산 유람에 장서각본 『臥遊錄』을 가지고 갔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산수 유람 기록은 林椿과 李仁老, 李奎報의 시대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여, 고려 후기와 조선에 와서 더욱 늘어났다. 특히 조선 전기에는 유람의 범위가 확대되며, 동일한 곳을 두고 여러 명의 문인들이 동시에 기록을 남겼다. 조선 후기에 遊山이 더욱 많아지면서 상당히 광대한 기록도 등장하였다. 그리하여 개인이 저술한 유람 기록이 독립적으로 成冊되기도 하였고, 『臥遊錄』 같은 유람 문학 선집이 나오게 되었다.
臥遊錄』에 실린 유람 기록의 작자들은 그 세계관과 유람의 목적에 따라 여러 가지 유람 태도를 보이고 있다. 儒家的 세계관을 뚜렷이 나타내는 작자는 산수 유람을 통해 心性을 수양하고 이것을 治民에까지 확충할 것을 목적으로 하며, 성리학적 사물관을 유람 과정에서 보여주었다. 또한 학문적 고증을 통해 佛家나 道家, 그 밖의 민간 풍속을 비판하였고, 佛家나 道家의 사상이 담긴 地名을 儒家的인 것으로 바꾸기도 하였다. 道家 계열의 작자는 道家의 자취를 전하거나, 피세의 장소를 제시하려는 의식을 보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람 기록은 특정한 세계관을 내세우지 않은 일반 문인들이 지은 것들로, 이들은 유람을 浩然之氣의 함양 방법으로 여겨 문학 수업에 중요한 수련 과정으로 보았다. 또한 金時習과 같은 불우한 처지에 놓인 사람은 사회에 대한 분노를 유람을 통하여 발산하려 하였다.

【자료적 특성 및 가치】

臥遊錄』의 자료적 가치는 높다. 첫째, 다른 문헌에 보이지 않는 작품들이 여러 편 수록되어 해당 작가에 대한 연구에 도움이 된다. 둘째, 당시 문사들이 읽던 書目들이 소개되어 있어 중국 서적의 유입 양상과 문사들의 독서범위를 잘 알 수 있게 한다. 셋째, 곳곳의 문화 유적에 대한 언급을 통하여 해당 시기 문화 유적의 존재와 그 상태를 잘 알 수 있게 한다. 넷째, 유람에서 마주치는 일을 통하여 당시의 인정물태를 잘 알 수 있게 한다. 다섯째, 유람의 풍속에서 국문시가의 연행 과정을 볼 수 있게 한다. 여섯째, 곳곳의 유람지와 관련된 詩文을 소개함으로써 특정 시인의 문학과 삶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된다.

【도산기 해제】

본 해제는 『臥遊錄』의 기사중 '陶山記'에 대한 해제입니다. 陶山記( 請求記號 : K2-4513, 해제자: 김태환) 李滉(朝鮮, 1501~1570) 著. 木板(刊年未詳). 1冊(16張); 30.3 × 23.1㎝. 『도산기』는 퇴계(退溪)의 수사고(手寫稿)를 목판으로 간행한 것인데, 장서각(1종)을 제외하고도 국립중앙도서관(5종)ㆍ규장각(2종)과 존경각(3종) 등에 그 인본(印本)이 여럿 소장되어 있다. 여기에서 가장 먼저 주목되는 자료는 존경각에 있는 분류기호 (B16FB-1570)의 인본이다. 이것에는 아래와 같은 발문이 붙어 있다. 만력(萬曆) 계유(癸酉, 1573) 초가을 초하루, 감사 이청지(李淸之)가 수양(首陽) 관사(館舍)로부터 신간(新刊)을 보냈다. … 허엽(許曄)은 삼가 발문(跋文)을 적는다. (“萬曆癸酉孟秋初吉, 友李監司淸之自首陽館寄以新刊. … 許曄謹跋.” 陶山記跋) 1573년 7월 1일, 감사 이청지가 해주로부터 신간을 보내 왔다는 소식을 허엽(許曄, 1571-1580)이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자세한 내막은 몰라도 『도산기』의 간행년도와 간행장소는 이로써 추정해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추정을 이제 다시 『고사촬요』(攷事撮要)에 적힌 책판 소식에 비추어 보건대, 1573년에 해주에서 간행되었던 것이 확실하다. 『고사촬요에 따르면, 『도산기』는 황해도 해주만이 아니라 경상도 영천에도 그 책판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 어느 쪽이 앞선 것인지. 요컨대 어느 것이 초간이고 어느 것이 번각인지. 새로운 의문이 생긴다. 『고사촬요』는 명종9년(1554)에 처음 편찬되었고, 이후로 여러 차례에 걸쳐서 속찬과 개수가 있었다. 다만 그 책판 소식은 선조18년(1585)을 하한으로 한다. 퇴계의 서거가 선조3년(1570)의 일이니, 의문의 시간 범위는 15년 이내가 된다. 『도산기』가 지어진 연도를 퇴계의 기문은 “嘉靖辛酉”(1561)라고 밝히고 있다. 『도산기』의 문헌적 성격과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은 고봉의 발문에 잘 나타나 있다. 도산기문(陶山記文) 1편, 곳에 따라 일을 적은 칠언절구(七言絶句) 18수, 또 오언절구(五言絶句) 잡영(雜詠) 26수, 별록(別錄) 4수는 제지(題識)가 아울러 있는데, 모두가 선생이 손수 적은 것으로서, 사이에 고친 흔적이 있으니, 처음에 이루어진 초본(草本)이다. (“右陶山記文一篇, 及逐處記事七言十八絶, 又五言雜詠二十六絶, 別錄四絶, 倂有題識, 皆先生所手寫, 間有塗改處, 蓋初間草本也.” 陶山記跋) 『도산기』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 해주에서 간행되었던 것인지, 여기에 관해서는 아직 자세히 살펴 보지 못했다. 그러나 주변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추적해 보면 밝힐 만한 자료가 있을 것이다. 우선은 원고로 전하던 『도산기』가 고봉의 시야에 들어와서 마지막 떠나기까지의 정황을 주목해 볼 만하다. 나의 벗 김취려(金就礪)가 일찍이 선생의 문하에 노닐다 이 초본을 얻어 가지고 왔는데, 소중히 다루기를 마치 남금(南金)이나 화박(和璞)과도 같이 하는 뿐만 아니라 선장(線裝)하여 첩자(帖子)로 만들어 가지고 보배를 만지며 즐기는 듯했다. 내가 일찍이 김군에게서 이것을 빌어다 즐기어 보는데, 김군은 나에게 그 끝에 몇 마디 발문(跋文)을 내어 달라고 바랐다. … 김군은 또 일찍이 나에게 그 첩자 속에 들어 있는 여러 시(詩)에 화운(和韻)하여 달라고 바라기도 했는데, 나는 비록 감히 가벼이 승낙하지는 못했지만, 마음으로는 또한 허락했었다. 그래서 이에 한가로운 겨를에 다시 칠언(七言) 18수를 우러러 화운하고, 아울러 첩자의 말미에 적으니, 거의 자잘한 뜻을 조금 나타낸 것이지, 감히 선생이 시에서 나타낸 뜻을 도와 밝혀낸 것은 아니다. 이로써 김군에게 바로잡아 주기를 바라고, 선생께 우러러 고쳐 주기를 바라는 뿐이다. (“余友金君就礪, 嘗遊先生之門, 得此本以歸, 重之不啻如南金和璞, 裝繕作帖, 以爲寶玩. 余嘗從金君借而玩之, 金君要余出數語跋其後. … 金君又嘗要余和帖中諸詩, 余雖不敢輕諾, 而心亦許之. 玆於閒中, 輒復仰步七言十八首, 倂寫之帖末, 庶幾少見區區之意, 非敢以爲有所助發也. 蓋欲以求正于金君, 而仰質於先生云爾.” 陶山記跋) 고봉의 발문이 작성된 것은 “隆慶四年”(1570) 오월의 일이다. 그리고 자신의 화운도 이 때에 이미 지어 놓은 터였다. 다만 원고의 말미에 베껴 넣는 일만을 미루어 두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 해에 퇴계가 세상을 떠났던 까닭에, 고봉은 자신의 화운을 보여 주려던 뜻을 끝내 이루지 못했다. 그래서 고봉은 다시 아래와 같은 후서를 남겼다. 내가 이 시를 이미 다 지어 놓고 선생께 올리려 했으나, 감히 아직 미처 첩자에 베껴 적지 못하고 게을리 있다가, 갑자기 산이 무너지는 아픔을 만났다. 유첩(遺帖)을 어루만지니, 슬픔이 더했다. 이제 마침 도성(都城)에 들어와, 김군을 만나 서로 옛일을 이야기하며 흐느끼고, 드디어 이 첩자를 꺼내어 놓고 적어서 돌려준다. (“余旣爲此詩, 欲以呈稟先生, 未敢遽寫諸帖, 懶慢因循, 忽遭山頹之慟. 撫玩遺帖, 益增悲惋. 今適入都, 見金君, 相與道舊摧咽, 遂出此帖, 書以歸之.” 陶山記後序) 고봉의 후서가 작성된 것은 “壬申(1572)五月”의 일이다. 따라서 『도산기』는 1572년 5월로부터 1573년 7월 1일까지의 기간을 통해서 간행에 부쳐진 셈이다. 김취려ㆍ김상여와 이청지ㆍ허엽의 관계를 따지면 좀더 자세한 사정을 알 수 있을 터이나, 이것은 뒤로 미룬다. 『도산기』는 은거의 사연과 그 주변을 적은 기문 1편, “逐處記事”에 해당하는 칠언절구 18수, “雜詠”에 해당하는 오언절구 26수, 별도로 덧붙인 오언절구 4수를 본문으로 한다. 그리고 각각의 시편에는 또한 “題識”가 딸려 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당연히 기문 1편이다. 그러니 『도산기』가 『퇴계선생문집』에 수록되면서 기문에 들어가지 않고 시집에 들어간 것은 적절하지 않은 점도 있다. 『도산기』는 퇴계의 친필을 보여 주는 바라서 후학의 애착이 컸다. 『도산기』는 더욱이 퇴계의 자연관(自然觀), 특히 자연미(自然美)에 대한 인식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 주는 점에서 깊이 연구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예컨대 아래와 같은 발언은 조선시대 유가 미학사상의 정수라고 할 만한 것이다. 옛날에 산림에서 사는 것으로써 즐거움을 삼았던 사람들을 보건대 또한 두 갈래가 있다. 현허(玄虛)를 그리워하고 고상(高尙)을 일삼는 가운데에 즐긴 사람들도 있고, 도의(道義)를 기뻐하고 심성(心性)을 기르는 가운데에 즐긴 사람들도 있다. 전자를 따르는 것으로 말하면, 제 한 몸을 깨끗하게 한답시고 인륜(人倫)을 어지럽게 하면서 심하게는 짐승과 함께 한 무리를 지어도 그르다고 여기지 않음이 두렵고, 후자를 따르는 것으로 말하면, 좋아하는 바는 성인의 조박(糟粕)일 뿐으로서 그 전할 수 없는 묘도(妙道)에 이르러서는 찾으려 하면 할수록 얻을 수 없으니, 무슨 즐거움이 있으랴? 비록 그러하나, 차라리 이것을 하자고 스스로 힘쓸지언정, 저것을 하자고 스스로 속이지는 아니할 것이다. (“觀古之有樂於山林者, 亦有二焉. 有慕玄虛, 事高尙而樂者, 有悅道義, 頤心性而樂者. 由前之說, 則恐或流於潔身亂倫, 而其甚則與鳥獸同羣, 不以爲非矣. 由後之說, 則所嗜者糟粕耳, 至其不可傳之妙, 則愈求而愈不得, 於樂何有. 雖然, 寧爲此而自勉, 不爲彼而自誣矣.” 陶山記) 이것은 단순히 유가의 입장에서 도가적 자연관을 배격한 데에 그치는 발언이 아니다. 우리가 주목할 바는 이른바 요산요수(樂山樂水)로써 ‘도의(道義)를 기뻐하고 심성(心性)을 기른다.’는 말이다. 요컨대 자연미는 도의를 감득하고 심성을 기르는 데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매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니, 퇴계는 이것을 다시 아래와 같이 부연했다. 어떤 이가 또 말하기를 “옛사람은 즐거움을 마음에서 얻었지 마음 밖의 사물(事物)에 기대어 얻지 않았다. 안연(顔淵)의 ‘너저분하고 더러운 거리’(陋巷)와 원헌(原憲)의 ‘깨어진 항아리의 아가리로 만든 바라지’(甕牖)로 말하면 어디에 산수(山水)가 있는가? 그러므로 무릇 마음 밖의 사물에 기대고 나서야 얻는 즐거움은 모두 참다운 즐거움이 아니다.”라고 했다. 나는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안연과 원헌이 몸을 붙이고 산 곳이라고 하는 것은 다만 제 몸에 알맞아 좋이 지낼 수 있음을 높이 여긴 것일 뿐이다. 만약에 이 사람들이 (도산의) 이 경(境)을 만나면 그 즐거움을 삼음이 어찌 우리보다 깊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공자(孔子)․맹자(孟子)는 언제나 온갖 말을 다해서 산수의 좋은 것을 일컫고 깊은 뜻을 거기에 부쳤다. 만약에 참으로 그대의 말과 같을진댄, 공자(孔子)의 ‘점(點)이를 허여(許與)한다.’는 칭탄(稱歎)은 어째서 다만 기수(沂水)의 위에서 터져 나왔겠으며, 주자(朱子)의 ‘삶을 여기에서 마치겠다.’는 원망(願望)은 어째서 오직 노봉(蘆峯)의 꼭대기에서 읊어졌겠는가? 이는 반드시 그 까닭이 있다.”라고 했다. (“曰, 古人之樂得之心, 而不假於外物. 夫顔淵之陋巷, 原憲之甕牖, 何有於山水. 故凡有待於外物者, 皆非眞樂也. 曰, 不然, 彼顔原之所處者, 特其適然而能安之爲貴耳. 使斯人而遇斯境, 則其爲樂, 豈不有深於吾徒者乎. 故孔孟之於山水, 未嘗不亟稱而深喩之. 若信如吾子之言, 則與點之歎, 何以特發於沂水之上, 卒歲之願, 何以獨詠於蘆峯之巓乎. 是必有其故矣.” 陶山記) 산수와 인간의 즐거움은 본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러므로 참다운 즐거움은 외물(外物)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퇴계는 혹자의 이러한 견해를 단호히 부정했다. 퇴계의 주장은 외물이 인간의 즐거움을 매개할 수 있다는 것이며, 외물의 매개는 즐거움의 주체로 더불어 필연적인 관련을 맺고 있다는 것이다. 퇴계의 주장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자연미는 일정한 도체(道體)를 지닌 객관적 존재이다. 이것은 자연미의 본질에 대한 규정이다. 둘째, 자연미는 인간의 심성에 작용하여 도의를 감득하고 심성을 기르는 데서 중요한 역량을 발휘한다. 이것은 공능에 대한 규정이다. 『도산기』에 담긴 퇴계의 사상을 여기에서 낱낱 다 매거할 수는 없으나, 그것이 만년의 퇴계와 그의 사상을 개략하는 성질의 것이라는 점을 지적해 둔다.

【도산기 번역】

陶山記 저자 : 이 황(李滉, 1501~1570) 역자 : 김태환 [ 記文 1篇 ] 1 靈芝之一支東出, 而爲陶山, 或曰, 以其山之再成而命之曰陶山也, 或云, 山中舊有陶竈, 故名之以其實也. 爲山不甚高大, 宅曠而勢絶, 占方位不偏, 故其旁之峯巒溪壑, 皆若拱揖環抱於此山然也. 山之在左曰東翠屛, 在右曰西翠屛. 東屛來自淸涼, 至山之東, 而列峀縹緲, 西屛來自靈芝, 至山之西, 而聳峯巍峩. 兩屛相望南行, 迤邐盤旋八九里許, 則東者西, 西者東, 而合勢於南野莽蒼之外. 水在山後曰退溪, 在山南曰洛川. 溪循山北, 而入洛川於山之東, 川自東屛, 而西趨, 至山之趾, 則演漾泓渟, 沿泝數里間. 深可行舟, 金沙玉礫, 淸瑩紺寒, 卽所謂濯纓潭也. 西觸于西屛之崖, 遂並其下, 南過大野, 而入于芙蓉峯下. 峯卽西者東, 而合勢之處也. 영지산(靈芝山) 한 갈래가 동쪽으로 벋어 나와 도산(陶山)을 이루되, 누구는 ‘산이 거듭 이루어져 겹쳐져 있는 까닭에 도산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이르고, 누구는 사람은 ‘산에 옛적에는 그릇 굽는 가마가 있었던 까닭에 그러한 실지를 가지고 이름을 붙였다.’고 이른다. 생김새가 너무 높지도 크지도 아니하며, 터가 넓고 벋음새가 빼어나며, 방위가 치우치지 아니하니, 그래서 그 곁의 산봉우리와 계곡이 모두 두 손을 모으고 절하는 모양으로 이 산을 둘러싸고 있는 듯하다. 산의 왼쪽에 있는 것을 동취병(東翠屛)이라 이르고, 오른쪽에 있는 것을 서취병(西翠屛)이라 이른다. 동취병은 청량산(淸涼山)에서 벋어 나와 산의 동쪽에 이르러 높고 멀게 봉우리를 벌이었고, 서취병은 영지산에서 벋어 나와 산의 서쪽에 이르러 높이 봉우리를 솟구었다. 두 취병(翠屛)이 서로 마주 바라보고 남쪽으로 흘러서 8․9리쯤을 비스듬히 잇달아 빙 돌아나면, 동쪽의 것은 서쪽으로 흐르고 서쪽의 것은 동쪽으로 흘러서 남쪽 들녘의 아득한 속에서 벋음새를 더한다. 산의 북쪽에 있는 물은 퇴계(退溪)라 이르고, 산의 남쪽에 있는 물은 낙천(洛川)이라 이른다. 퇴계는 도산의 북쪽을 따라 흐르다가 산의 동쪽에서 낙천으로 들어가고, 낙천은 동취병으로부터 서쪽으로 흐르다가 도산의 기슭에 이르면 깊은 웅덩이를 출렁이며 몇 리 동안을 굽이쳐 흐른다. 깊이는 배를 띄울 만하고, 금빛 모레와 옥빛 자갈이 깔려 있고, 맑디맑은 물은 빛이 차갑도록 검푸르니, 이른바 곧 탁영담(濯纓潭)이다. 서쪽으로 서취병의 기슭을 스쳐서 마침내 그 밑을 모두 아우르고 남쪽으로 너른 들을 지나 부용봉(芙蓉峯) 아래로 들어간다. 부용봉은 곧 서쪽의 것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벋음새를 더하는 곳이다. 2 始余卜居溪上, 臨溪縛屋數間, 以爲藏書養拙之所, 蓋已三遷其地, 而輒爲風雨所壞, 且以溪上偏於闃寂, 而不稱於曠懷. 乃更謀遷, 而得地於山之南也, 爰有小洞, 前俯江郊, 幽夐遼廓, 巖麓悄蒨, 石井甘冽, 允宜肥遯之所. 野人田其中, 以資易之, 有浮屠法蓮者, 榦其事, 俄而蓮死, 淨一者繼之. 自丁巳至于辛酉, 五年而堂舍兩屋粗成, 可棲息也. 堂凡三間. 中一間曰玩樂齋, 取朱先生名堂室記, 樂而玩之, 足以終吾身, 而不厭之語也. 東一間曰巖栖軒, 取雲谷詩, 自信久未能, 巖栖冀微效之語也. 又合而扁之曰陶山書堂. 舍凡八間. 齋曰時習, 寮曰止宿, 軒曰觀瀾, 合而扁之曰隴雲精舍. 堂之東偏, 鑿小方塘, 種蓮其中, 曰淨友塘. 又其東爲蒙泉, 泉上山脚, 鑿令與軒對平, 築之爲壇, 而植其上梅竹松菊, 曰節友社. 堂前出入處, 掩以柴扉, 曰幽貞門. 門外小徑, 緣磵而下, 至于洞口. 兩麓相對, 其東麓之脅, 開巖築址, 可作小亭, 而力不及, 只存其處, 有似山門者, 曰谷口巖. 自此東轉數步, 山麓斗斷, 正控濯纓, 潭上巨石削立, 層累可十餘丈, 築其上爲臺. 松棚翳日, 上天下水, 羽鱗飛躍, 左右翠屛, 動影涵碧, 江山之勝, 一覽盡得, 曰天淵臺. 西麓亦擬築臺, 而名之曰天光雲影, 其勝槩當不減於天淵也. 盤陀石在濯纓潭中, 其狀盤陀, 可以繫舟傳觴. 每遇潦漲, 則與齊俱入, 至水落波淸, 然後始呈露也. 처음에 내가 계상(溪上)에다 몸을 붙이고 살 만한 터를 가려 찾을 적에는 퇴계를 가까이 마주하고 몇 칸의 집을 세워 서책(書冊)이나 들여 놓고 졸박(拙朴)하나마 타고난 덕성(德性)을 다치잖게 잘 지니어 기르는 곳으로 삼았던 것인데, 이미 세 차례나 그 터를 옮기고도 문득 비바람에 무너지는 바가 되었고, 더욱이 계상은 쓸쓸한 데에 치우쳐 있어서 마음을 탁 트이게 하는 데는 마땅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옮길 것을 꾀하여, 도산의 남쪽에서 터를 얻으니, 거기에 작은 마을이 있어서 앞으로 강과 들을 굽어보는 눈길이 그윽이 멀고 넓으며, 바위가 들어찬 산기슭은 풀과 나무가 우거져 있으며, 돌틈으로 흐르는 샘물은 달고도 차가워, 참으로 세속(世俗)을 벗어나 포근히 들어가 지낼 만한 곳으로는 마땅하였다. 시골 사람이 그 안에 밭을 일구어 놓은 것을 돈을 치루고 바꾸었다. 법련(法蓮)이라는 중이 그 일을 맡았는데, 갑자기 죽어서 정일(淨一)이라는 이가 이어갔다. 정사(丁巳: 1557) 년으로부터 신유(辛酉: 1561) 년에 이르기까지 5년 만에 당(堂)․사(舍) 두 집을 거칠게나마 지어내어 깃들일 만하게 되었다. 당은 무릇 세 칸이다. 가운데 한 칸은 완락재(玩樂齋)라 이르니, 주자(朱子)의 「명당실기」(名堂室記)에 나오는 “좋아하여 즐거워하고 거듭해서 익히매, 이로써 나의 몸이 다하도록 싫지 않을 만하다.”라는 말에서 가져온 것이고, 동쪽 한 칸은 암서헌(巖栖軒)이라 이르니, 주자의 「운곡」(雲谷) 시에 나오는 “스스로 미덥기가 세간(世間)에 오래 머무를 만큼은 아니매, 산속에 파묻혀 살아 작은 보람이나마 얻고자 바란다.”라는 말에서 가져온 것이다. 아울러 한데 더해서 편액(扁額)에 적기를 도산서당(陶山書堂)이라 일렀다. 사는 무릇 여덟 칸이다. 재(齋)는 시습(時習)이라 이르고, 료(寮)는 지숙(止宿)이라 이르고, 헌(軒)은 관란(觀瀾)이라 일렀다. 모두를 한데 더해서 편액에 적기를 농운정사(隴雲精舍)라 일렀다. 당의 동편에 작게 네모난 못을 파고 그 속에 연꽃을 심어 정우당(淨友塘)이라 일렀다. 또 그 동쪽은 샘을 얹혀 놓고, 샘 위의 산기슭을 헌과 마주하여 높이가 서로 나란하도록 깎아 내어 단(壇)을 쌓고, 그 위에 매화․대나무․소나무․국화를 심어 절우사(節友社)라 일렀다. 당의 앞으로 나고 드는 곳은 사립으로 가리고 유정문(幽貞門)이라 일렀다. 유정문 밖으로 나 있는 작은 오솔길은 시내를 따라 내려가 마을 어귀에까지 이른다. 두 산기슭이 서로 마주하고 있는 데서, 그 동쪽 기슭의 곁으로 바위를 열어젖히고 터를 닦으매, 작은 정자를 지을 만했으나, 재력(財力)이 모자라 다만 그 자리만을 남겨 두었는데, 마치 산문(山門)처럼 생겨서 곡구암(谷口巖)이라 일렀다. 이곳으로부터 동쪽으로 몇 걸음을 돌아들면 산기슭이 갑자기 끊기면서 탁영담을 한가운데로부터 짓누르매, 탁영담 위로 커다란 돌들이 깎아지른 듯이 버티고 섰으니, 겹겹이 쌓인 높이가 열 발이나 남짓한데, 그 위에 터를 다져 대(臺)를 만들었다. 시렁처럼 펼쳐진 소나무 가지가 햇볕을 가려주고, 위로는 하늘과 아래로는 물뿐인 속에 날짐승과 물고기가 뛰고 날며, 좌우로 서 있는 취병의 그림자를 띄워 흔들고 푸른빛을 적시매, 강산(江山)의 뛰어남을 한눈에 모두 다 얻을 수 있으니, 천연대(天淵臺)라 일렀다. 서쪽 기슭도 또한 천연대에 견주어 대를 쌓고 이름을 붙여 천광운영(天光雲影)이라 했으니, 그 뛰어남이 천연대보다 못하지 않은 까닭이다. 반타석(盤陀石)은 탁영담 속에 있는데, 그 생김새가 마치 반타(盤陀)처럼 생겨서 배를 매어 두고 술자리를 마련할 만하다. 언제나 큰비를 만나 물이 넘치면 소용돌이와 함께 물속으로 빨려 들어갔다가 물이 줄고 물결이 맑아진 뒤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3 余恒苦積病纏繞, 雖山居, 不能極意讀書. 幽憂調息之餘, 有時身體輕安, 心神灑醒, 俛仰宇宙, 感慨係之, 則撥書携笻而出, 臨軒翫塘, 陟壇尋社, 巡圃蒔藥, 搜林擷芳. 或坐石弄泉, 登臺望雲, 或磯上觀魚, 舟中狎鷗. 隨意所適, 逍遙徜徉, 觸目發興, 遇景成趣, 至興極而返. 則一室岑寂, 圖書滿壁, 對案嘿坐, 兢存硏索, 往往有會于心, 輒復欣然忘食, 其有不合者, 資於麗澤. 又不得, 則發於憤悱, 猶不敢强而通之. 且置一邊, 時復拈出, 虛心思繹, 以俟其自解. 今日如是, 明日又如是.若夫山鳥嚶鳴, 時物暢茂, 風霜刻厲, 雪月凝輝, 四時之景不同, 而趣亦無窮, 自非大寒, 大署, 大風, 大雨, 無時無日而不出. 出如是, 返亦如是. 是則閑居養疾, 無用之功業, 雖不能窺古人之門庭, 而其所以自娛悅於中者不淺, 雖欲無言, 而不可得也. 於是, 逐處各以七言一首紀其事, 凡得十八絶. 又有蒙泉, 冽井, 庭草, 磵柳, 菜圃, 花砌, 西麓, 南沜, 翠微, 寥朗, 釣磯, 月艇, 鶴汀, 鷗渚, 魚梁, 漁村, 烟林, 雪徑, 櫟遷, 漆園, 江寺, 官亭, 長郊, 遠岫, 土城, 校洞等, 五言雜詠二十六絶, 所以道前詩不盡之餘意也. 나는 늘 적병(積病)에 휘감겨 괴로움을 겪는 까닭에, 비록 산에서 지내기는 해도 뜻을 다하여 글을 읽을 수는 없었다. 깊숙이 지닌 근심을 다스리는 겨를에 때로 몸이 가뿐히 좋으며 마음이 시원스레 깨이면, 위아래로 온 누리를 굽어보고 쳐다보매, 북받치는 느낌이 거기에 이어지면, 책을 덮고 지팡이를 짚고 나가 헌에 기대어 정우당을 바라보거나 단에 올라 절우사를 거닐고, 채마밭을 돌면서 약초를 심거나 수풀을 뒤져 꽃나무를 뽑아 옮겼다. 때로는 돌에 앉아 샘물소리로 놀이를 삼거나 천연대에 올라 구름을 바라보고, 때로는 물가에서 물고기를 구경하거나 뱃속에서 갈매기를 가까이 두고 놀았다. 발길이 닿는 대로 뜻을 좇아 이리저리 노닐며, 눈길이 닿는 대로 흥(興)을 일으키고, 경(景)을 만나는 대로 취(趣)를 이루어, 흥이 지극한 데에 이르고 나서야 돌아왔다. 그러면 방안은 호젓하고 도서(圖書)는 바람벽에 가득하며, 책상을 마주하고 말없이 앉아서 삼가 존양(存養)하고 연구(硏究)하매, 이따금 마음에 딱 들어맞게 깨우치는 것이 있으면 그때마다 거듭 기쁜 나머지 밥을 먹는 일조차 잊으며, 들어맞지 않는 것이 있으면 벗들의 도움에 기댔다. 그러고도 또한 깨우침을 얻지 못하면 안으로 결기를 내고 덤비되, 오히려 감히 억지로 꿰어 맞추려고 하지는 않았다. 한쪽에 미루어 두었다가 때로 다시 꺼내어 마음을 비우고 깊이깊이 헤아리는 가운데에 그것이 저절로 풀리기를 기다렸다. 오늘도 이렇게 하고, 내일도 또 이렇게 했다. 산새가 지저귈 양이면, 한 해의 만물(萬物)이 짙도록 우거지고, 바람과 서리가 몹시 사나울 양이면, 쌓인 눈과 달빛이 서로 엉기어 빛나니, 네 철의 경물(景物)이 같지 않으매 흥취(興趣)가 또한 끝이 없으니, 너무 춥거나 너무 덥거나 바람이 너무 세거나 비가 너무 많이 오는 때가 아니던 바에는 나가지 아니한 날이 없었다. 나가는 것도 이와 같았고, 돌아오는 것도 이와 같았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한가로이 지내면서 병이나 고치는, 쓸데없는 것이라 비록 옛 사람의 하던 마당에 비길 수는 없지만, 그런 가운데에도 스스로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바는 얄팍하지가 않았으니, 비록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 해도 못내 그리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자리를 좇아서 저마다 7언으로 1수씩 그 일을 적어 무릇 절구 18수를 얻었다. 또한 「몽천」(蒙泉)․「열정」(冽井)․「정초」(庭草)․「간류」(磵柳)․「채포」(菜圃)․「화체」(花砌)․「서록」(西麓)․「남반」(南沜)․「취미」(翠微)․「요랑」(寥朗)․「조기」(釣磯)․「월정」(月艇)․「학정」(鶴汀)․「구저」(鷗渚)․「어량」(魚梁)․「어촌」(漁村)․「연림」(烟林)․「설경」(雪徑)․「력천」(櫟遷)․「칠원」(漆園)․「강사」(江寺)․「관정」(官亭)․「장교」(長郊)․「원수」(遠岫)․「토성」(土城)․「교동」(校洞) 따위의 5언 잡영 절구 26수가 있으니, 앞서 말한 시에서 다하지 못한 나머지의 뜻을 말한 것이다. 4 嗚呼, 余之不幸, 晩生遐裔, 樸陋無聞, 而顧於山林之間, 夙知有可樂也. 中年妄出世路, 風埃顚倒, 逆旅推遷, 幾不及自返以死也. 其後, 年益老, 病益深, 行益躓, 則世不我棄, 而我不得不棄於世. 乃始脫身樊籠, 投分農畝, 而向之所謂山林之樂者, 不期而當我之前矣. 然則, 余乃今所以消積病, 豁幽憂, 而晏然於窮老之域者, 舍是將何求矣. 雖然, 觀古之有樂於山林者, 亦有二焉. 有慕玄虛, 事高尙而樂者, 有悅道義, 頤心性而樂者. 由前之說, 則恐或流於潔身亂倫, 而其甚則與鳥獸同羣, 不以爲非矣. 由後之說, 則所嗜者糟粕耳, 至其不可傳之妙, 則愈求而愈不得, 於樂何有. 雖然, 寧爲此而自勉, 不爲彼而自誣矣. 又何暇知, 有所謂世俗之營營者, 而入我之靈臺乎. 아아, 나는 불행히 성인(聖人)으로부터 동떨어진 후예(後裔)로 뒤늦게 태어나 마냥 시골에 살아 무슨 배움도 없으나, 산림(山林)에 마음을 두고서 여기에 즐길 만한 것이 있음을 일찍부터 알았다. 마흔 안팎에는 헛되이 세상에 나갔다가 엎어지고 넘어지며 객지(客地)에 옮겨 다니는 가운데에 거의 스스로는 돌아오지 못하고 죽을 참이었다. 그 뒤로 나이는 더욱 늙어가고 병은 더욱 깊어지고 행실(行實)은 더욱 틀어져 세상이 아니 나를 버린다고 해도 내가 세상을 아니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비로소 새장에서 몸을 빼내어 농토(農土)에 던져 넣으니, 옛적의 이른바 산림의 즐거움이라는 것이 굳이 바라지 않아도 내 앞에 닥쳤다. 그러므로 내가 이제 나의 적병을 없애고 깊숙이 지닌 근심을 트이게 하여 늙마를 아무 일 없이 좋이 지낼 곳으로는 여기를 버리고 다시 어디에서 찾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옛날에 산림에서 사는 것으로써 즐거움을 삼았던 사람들을 보건대 또한 두 갈래가 있다. 현허(玄虛)를 그리워하고 고상(高尙)을 일삼는 가운데에 즐긴 사람들도 있고, 도의(道義)를 기뻐하고 심성(心性)을 기르는 가운데에 즐긴 사람들도 있다. 전자를 따르는 것으로 말하면, 제 한 몸을 깨끗하게 한답시고 인륜(人倫)을 어지럽게 하면서 심하게는 짐승과 함께 한 무리를 지어도 그르다고 여기지 않음이 두렵고, 후자를 따르는 것으로 말하면, 좋아하는 바는 성인의 조박(糟粕)일 뿐으로서 그 전할 수 없는 묘도(妙道)에 이르러서는 찾으려 하면 할수록 얻을 수 없으니, 무슨 즐거움이 있으랴? 비록 그러하나, 차라리 이것을 하자고 스스로 힘쓸지언정, 저것을 하자고 스스로 속이지는 아니할 것이다. 그러니 또한 어느 겨를에 이른바 세속의 명리(名利)를 좇는 일이 있어서 그것이 내 마음에 들어오는 줄을 알겠는가? 5 或曰, 古之愛山者, 必得名山以自託, 子之不居淸涼, 而居此何也. 曰, 淸涼壁立萬仞, 而危臨絶壑, 老病者所不能安. 且武夷所以爲天下絶勝者, 以中有九曲水也. - 自武夷至曲水十六字, 易而樂山樂水缺一不可八字. - 今洛川雖過淸涼, 而山中不知有水. - 有水下有焉字. - 余固有淸涼之願矣. 然而, 後彼而先此者, 凡以兼山水, 而逸老病也. 曰, 古人之樂得之心, 而不假於外物. 夫顔淵之陋巷, 原憲之甕牖, 何有於山水. 故凡有待於外物者, 皆非眞樂也. 曰, 不然, 彼顔原之所處者, 特其適然而能安之爲貴耳. 使斯人而遇斯境, 則其爲樂, 豈不有深於吾徒者乎. 故孔孟之於山水, 未嘗不亟稱而深喩之. 若信如吾子之言, 則與點之歎, 何以特發於沂水之上, 卒歲之願, 何以獨詠於蘆峯之巓乎. 是必有其故矣. 嘉靖辛酉日南至, 山主老病畸人記. 어떤 이가 말하기를 “옛적에 산을 좋아한 사람들은 반드시 이름난 산을 얻어서 몸을 맡겼는데, 그대는 어째서 청량산에 들어앉지 아니하고 이 산에 들어앉아 사는가?”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청량산은 만 길이나 깎아지른 듯이 서 있고 깊고 험한 골짜기에 아스라하게 닿아 있어, 늙고 병든 사람이 좋이 지낼 수 없는 바의 곳이다. 하물며 무이산(武夷山)이 천하의 빼어나게 아름다운 곳이 되었던 까닭은 그 안에 아홉 굽이의 물을 가졌기 때문이다. - ‘무이산’으로부터 ‘아홉 굽이의 물을 가졌기 때문이다.’까지를 ‘산을 좋아하는 것과 물을 좋아하는 것은 어느 하나도 빠뜨릴 수 없다.’로 바꾼다. - 이제 낙천이 비록 청량산을 지나기는 하지만 산속에서는 물이 있음을 알 수가 없고, - ‘물이 있음을 알 수가 없고’의 아래에 ‘焉’이라는 글자를 넣어서 ‘물이 있음을 알 수가 없다.’라고 문장을 마친다. - 나도 참으로 청량산을 바라는 뜻이 있다. 그러나 저것을 뒤로 하고 이것을 앞세운 것은 무릇 산과 물을 한데 아우르고, 늙고 병든 몸을 편안케 하고자 하는 까닭이다.” 어떤 이가 또 말하기를 “옛사람은 즐거움을 마음에서 얻었지 마음 밖의 사물(事物)에 기대어 얻지 않았다. 안연(顔淵)의 ‘너저분하고 더러운 거리’(陋巷)와 원헌(原憲)의 ‘깨어진 항아리의 아가리로 만든 바라지’(甕牖)로 말하면 어디에 산수(山水)가 있는가? 그러므로 무릇 마음 밖의 사물에 기대고 나서야 얻는 즐거움은 모두 참다운 즐거움이 아니다.”라고 했다. 나는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안연과 원헌이 몸을 붙이고 산 곳이라고 하는 것은 다만 제 몸에 알맞아 좋이 지낼 수 있음을 높이 여긴 것일 뿐이다. 만약에 이 사람들이 (도산의) 이 경(境)을 만나면 그 즐거움을 삼음이 어찌 우리보다 깊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공자(孔子)․맹자(孟子)는 언제나 온갖 말을 다해서 산수의 좋은 것을 일컫고 깊은 뜻을 거기에 부쳤다. 만약에 참으로 그대의 말과 같을진댄, 공자(孔子)의 ‘점(點)이를 허여(許與)한다.’는 칭탄(稱歎)은 어째서 다만 기수(沂水)의 위에서 터져 나왔겠으며, 주자(朱子)의 ‘삶을 여기에서 마치겠다.’는 원망(願望)은 어째서 오직 노봉(蘆峯)의 꼭대기에서 읊어졌겠는가? 이는 반드시 그 까닭이 있다.”라고 했다. 가정(嘉靖) 신유(辛酉: 1561) 동지(冬至), 산주(山主)이자 늙마에 병으로 불구(不具)인 늙은이가 적는다. [ 七言絶句 18首 ] 陶山書堂 - 陶意見記. 今詩中, 或事或姓, 點綴陶字, 乃事外映事, 以寓意耳. - 大舜親陶樂且安, 淵明躬稼亦歡顔. 聖賢心事吾何得, 白首歸來試考槃. 「도산서당」 - ‘陶’[도]의 뜻은 기문(記文)에 보인다. 이제 이 시 가운데 고사(古事)을 들고 사람의 성씨(姓氏)를 들어 ‘陶’[도]자를 잇달아 엮어 놓은 것은 곧 일 밖에 일을 비추어 이로써 뜻을 부친 것일 따름이다. - 순(舜)임금은 몸소 질그릇을 구웠지만 즐겁고도 편안하였고, 도연명(陶淵明)은 몸소 농사를 지었지만 또한 기쁜 낯이었다. 성현의 마음을 내 어찌 알리오? 늙마에 돌아와 숨어 살면서 산수나 즐긴다. 巖栖軒 - 曾子稱顔淵有若無, 實若虛. 屛山字晦庵, 以是祝之. 晦庵詩, 自信久未能, 巖棲冀微效. 名軒以自勖. - 曾氏稱顔實若虛, 屛山引發晦翁初. 暮年窺得巖栖意, 博約淵氷恐自疎. 「암서헌」 - 증자(曾子)는 안연(顔淵)의 있는 듯하면서도 없고 찬 듯하면서도 빈 풍모를 칭송하였다. 병산(屛山) 유자휘(劉子翬)는 회암(晦庵)이라는 글자를 적어 내리며 이로써 축원하였다. 회암의 시에 “스스로 미덥기가 세간에 오래 머무를 만큼은 아니매, 산속에 파묻혀 살아 작은 보람이나마 얻고자 바란다.”라고 했으니, 이로써 헌에 이름을 붙이고 스스로 힘쓴다. - 증자는 안자의 찬 듯하면서도 빈 풍모를 칭송하였고, 병산은 이로써 회암의 초심(初心)을 이끌어 주었다. 늙마에야 산속에 파묻혀 사는 뜻을 알았거니와, 박약(博約) 공부와 연빙(淵氷) 수양에 멀어질까 두려워한다. 玩樂齋 - 朱子名堂室記, 以持敬明義, 動靜循環之功, 爲合乎周子太極之論, 足以玩樂而忘外慕. 今以名齋而日加警焉. - 主敬還須集義功, 非忘非助漸融通. 恰臻太極濂溪妙, 始信千年此樂同. 「완락재」 - 주자(朱子)의 「명당실기」에 ‘경(敬)을 가지고 의(義)를 밝히며 동정(動靜)을 되풀이하는 공효(功效)를 주자(周子)의 태극론(太極論)에 부합시키고 이로써 좋아하고 즐거워하여 그 밖의 것을 그리는 일을 잊을 만하다.’고 하였다. 이제 이로써 제의 이름을 붙이고 날로 경계(警戒)하는 마음을 더한다. - 지경(持敬) 공부에 반드시 집의(集義) 공효가 있어야 하니, 잊지도 말며 돕지도 말아 점차로 융통하여야 한다. 염계(濂溪)의 태극(太極)의 묘리(妙理)에 이를진댄, 천년을 두고도 이 즐거움이 같음을 비로소 알 것이다. 幽貞門 不待韓公假大龜, 新居縹緲映柴扉. 未應山徑憂茅塞, 道在幽貞覺坦夷. 「유정문」 한공(韓公)이 큰 거북이로 점치던 일을 기다리지 않더라도, 새로운 거처가 사립문에 아련히 비친다. 산길이 띠 풀에 막힐 걱정은 하지 않느니, 도(道)가 유정(幽貞)한 데 있어 그 평탄(平坦)한 줄을 깨닫는다. 淨友塘 - 濂溪愛蓮說, 稱蓮美非一, 而曾端伯獨呼爲淨友, 恐未盡也. - 物物皆含妙一天, 濂溪何事獨君憐. 細思馨德眞難友, 一淨稱呼恐亦偏. 「정우당」 - 염계의 「애련설」(愛蓮說)에 연꽃의 아름다움을 칭송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일찍이 단백(端伯)은 오직 ‘정우’(淨友)을 말하는 데 그쳤으니, 아마도 미진한 듯하다. - 온갖 것이 모두 하나의 묘한 천리(天理)를 머금되, 염계는 무슨 일로 홀로 그대를 사랑했는지? 형덕(馨德)을 찬찬히 생각자니 참으로 벗하기 어렵거니와, 한낱 깨끗함만을 기린다면 아마도 치우친 듯하다. 節友社 - 陶公三徑, 梅獨見遺, 盖不但離騷爲欠典也. - 松菊陶園與竹三, 梅兄胡奈不同參. 我今倂作風霜契, 苦節淸芬儘飽諳. 「절우사」 - 도공(陶公)의 세 가지 길에서 매(梅)는 홀로 버림을 받았으니, 다만 「이소」(離騷)에서만 빠졌던 것이 아니다. - 도연명의 동산은 소나무ㆍ국화와 대나무의 세 가지만 있었으니, 매형(梅兄)은 어찌 거기에 들지 못했던 것인가? 나는 이제 함께 넣어 풍상계(風霜契)를 맺노니, 고절(苦節)과 청분(淸芬)을 못내 다 외운다. 隴雲精舍 常愛陶公隴上雲, 唯堪自悅未輸君. 晩來結屋中間臥, 一半閑情野鹿分. 「농운정사」 도연명의 언덕 위 구름을 늘 사랑하노니, 오직 홀로 기뻐할 뿐, 그대들에게 줄 수는 없구나. 늙마에 집을 짓고 그 속에 누워서는, 한 조각 한정(閑情)을 사슴과 나눠 가진다. 時習齋 日事明誠類數飛, 重思複踐趁時時. 得深正在工夫熟, 何啻珍烹悅口頤. 「시습재」 날마다 명성(明誠) 공부를 새가 자주 나는 것처럼 하고, 거듭 생각하고 다시 몸소 밟아 나가기를 끊임없이 한다. 깊이 얻는 것은 공부가 익숙한 데 있으니, 어찌 좋은 음식이 입을 기쁘게 함과 같을 뿐이랴? 止宿寮 愧無雞黍謾留君, 我亦初非鳥獸群. 願把從師浮海志, 聯床終夜細云云. 「지숙료」 닭고기와 기장밥도 없이 그대를 머물게 하니 부끄러우나, 나도 또한 애초부터 조수(鳥獸)와 무리를 이루자던 것이 아니다. 바라건대 스승을 따라 바다에 뗏목을 띄울 뜻을 가졌던 것이니, 침상을 맞대어 놓고 밤새도록 자세한 이야기 나누자. 觀瀾軒 浩浩洋洋理若何, 如斯曾發聖咨嗟. 縱然道體因玆見, 莫使工夫間斷多. 「관란헌」 넓디넓게 넘실거리니 그 이치가 어떠한가? ‘이와 같구나.’라고 일찍이 성인이 탄식하였다. 다행히 도체(道體)가 여기서 드러나니, 공부가 끊임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谷口巖 東躡江臺北入雲, 開荒谷口擬山門. 此名偶似前賢地, 耕隱高情詎易論. 「곡구암」 동쪽으로 강대(江臺)를 딛고 북쪽으로 구름에 들어, 거친 곡구(谷口)를 열어 산문(山門)을 만들었다. 이 이름이 우연히 옛 현인(賢人)의 살던 땅과 비슷하거니, 밭 갈며 숨어 살던 풍성(風聲)을 어찌 수이 말하리? 天淵臺 縱翼揚鱗孰使然, 生生活潑妙天淵. 江臺盡日開心眼, 三復明誠一巨編. 「천연대」 솔개 날고 물고기 뛰는 것 누가 시켰나? 생생(生生)과 활발(活潑)이 천연(天淵)에 묘하구나. 강대에서 종일토록 마음의 눈을 여노니, 명성(明誠), 하나의 큰 책을 세 번 거듭 외운다. - 天光雲影入此. - - 「천광운영」이 여기로 들어온다. - 濯纓潭 漁父當年笑獨醒, 何如孔聖戒丁寧. 我來叩枻吟風月, 卻喜淸潭可濯纓. 「탁영담」 어부가 당년에 홀로 깨어 있음을 비웃었거니와, 공자(孔子)가 친절히 경계하던 것은 어떠한가? 내가 와서 노를 두드리고 풍월을 읊자니, 맑은 못에 갓끈 씻을 수 있어 도리어 기쁘다. 盤陀石 黃濁滔滔便隱形, 安流帖帖始分明. 可憐如許奔衝裏, 千古盤陀不轉傾. 「반타석」 누렇게 흐린 물결 거침없이 흐르는 속에 문득 몸을 숨겼다가, 느릿한 물결 잔잔히 흐르는 때는 비로소 또렷하다. 가련타, 세찬 물결 속에 몸을 맡기되, 천고에 반타(盤陀)는 구르지도 기울지도 않는다. 東翠屛山 簇簇群巒左翠屛, 晴嵐時帶白雲橫. 斯須變化成飛雨, 疑是營丘筆下生. 「동취병산」 옹기종기 여러 봉우리 왼쪽 푸른 병풍, 비 갠 이내에 때로 흰 구름을 가로 두른다. 잠깐 동안에 바뀌어 비를 날리니, 영구(營丘)의 붓끝에서 생기는 듯싶다. 西翠屛山 嶷嶷羣峯右翠屛, 中藏蘭若下園亭. 高吟坐對眞宜晩, 一任浮雲萬古靑. 「서취병산」 우뚝우뚝 여러 봉우리 오른쪽 푸른 병풍, 가운데 절이 있고 아래는 원정(園亭)이다. 큰 소리로 읊조리며 앉아서 마주하기 저물녘이 마땅하되, 만고의 푸르름, 한결같이 뜬구름이 맡긴다. 芙蓉峯 南望雲峯半隱形, 芙蓉曾見足嘉名. 主人亦有烟霞癖, 茅棟深懷久未成. - 趙士敬居其下. - 「부용봉」 남쪽의 구름 낀 봉우리 반쯤 숨은 모양인데, 부용(芙蓉)이라니 아름다운 이름이구나. 주인이 또한 연하(煙霞)의 고질(痼疾)이 있건만, 띠집 지으려던 깊은 뜻을 오래도록 이루지 못했다. - 조사경(趙士敬)이 그 아래에 산다. - 天光雲影臺 - 當在天淵臺下. - 活水天雲鑑影光, 觀書深喩在方塘, 我今得意淸潭上, 恰似當年感歎長, 「천광운영대」 - 마땅히 「천연대」 아래에 있어야 하겠다. - 하늘빛, 구름 그림자, 활수(活水)에 비치던, 「관서」(觀書) 시의 깊은 비유는 방당(方塘)에 있었다. 나도 이제 맑은 못 위에서 깨우쳐 아노니, 당년의 감탄, 길었던 사연과 비슷하구나. [ 五言絶句 本篇 26首 ] 蒙泉 - 書堂之東, 有泉曰蒙. 何以體之, 養正之功. - 山泉卦爲蒙, 厥象吾所服, 豈敢忘時中, 尤當思果育, 「몽천」 - 서당 동쪽에 샘이 있어 몽천이라 이른다. 어떻게 체득하랴? 양정(養正)의 공효이다. - 산에서 나는 샘물의 괘(卦)가 몽(蒙)이니, 그 상(象)은 내가 늘 감복(感服)하는 바이다. 시중(時中)을 어찌 감히 잊으랴? 더욱이 과육(果育)을 생각해야 하겠다. 冽井 - 書堂之南, 石井甘冽. 千古烟沈, 從今勿幕. - 石間井冽寒, 自在寧心惻. 幽人爲卜居, 一瓢眞相得. 「열정」 - 서당의 남쪽에 돌우물이 달고도 차다. 천고의 안개가 잠기던 것을, 이제는 덮어 두지 말지다. - 돌 틈에 난 우물이 차니, 저절로 있되 어찌 마음이 슬프랴? 유인(幽人)이 거처로 삼으니, 한 바가지 물이 참으로 기껍다. 庭草 - 幽庭細草, 造化生生. 目擊道存, 意思如馨. - 庭草思一般, 誰能契微旨. 圖書露天機, 只在潛心耳. 「정초」 - 그윽한 뜰에 자잘한 풀이 조화로 생기고 또 생긴다. 도(道)가 눈 닿는 곳마다 있거니, 의사(意思)가 향기와 같구나. - 뜰에 난 풀의 뜻이 내 뜻과 한가지라 하니, 누가 그 미지(微志)를 깨우쳐 알랴? 태극도(太極圖)와 통서(通書)가 천기(天機)를 드러내기는, 다만 골똘히 생각하는 데 있을 뿐이다. 磵柳 - 磵邊垂柳, 濯濯風度. 陶邵賞好, 起我遐慕. - 無窮造化春, 自是風流樹. 千載兩節翁, 長吟幾興寓. 「간류」 - 시냇가의 수양버들, 깨끗한 풍도. 도연명과 소강절(邵康節)이 좋아하여, 나의 먼 그리움을 일으킨다. - 끝없이 조화로운 봄날, 저절로 풍류를 띤 나무. 천재에 두 절옹(節翁), 길이 읊어 얼마나 흥을 부쳤나? 菜圃 - 節友社南, 隙地爲圃. 下帷多暇, 抱甕何苦. - 小圃雲間靜, 嘉蔬雨後滋. 趣成眞自得, 學誤未全癡. 「채포」 - 절우사(節右社) 남쪽, 남은 땅에 채소밭을 만들었다. 장막을 내리매 겨를이 많아, 물독을 안고 나름이 어지 힘들랴? - 작은 채소밭이 구름 속에 고요하고, 좋은 채소들이 비 뒤에 우거진다. 흥취가 이루어지매 참으로 뿌듯하거니, 배움은 그르쳤어도 아주 어리석지는 않구나. 花砌 - 堂後衆花, 雜植爛爛. 天地精英, 莫非佳玩. - 曲砌無人跡, 幽香發秀姿. 風輕午吟處, 露重曉看時. 「화체」 - 서당 뒤에 갖가지 꽃들, 어지러이 섞어 심었다. 천지(天地)의 정영(精英), 아름답지 아니한 것이 없구나. - 굽이친 화단에 아무도 발자취 없는데, 그윽한 꽃이 빼어난 자태를 드러낸다. 바람 가벼운 한낮, 읊조리는 곳, 새벽에 볼 대는 이슬이 무겁다. 西麓 - 悄蒨西麓, 堪結其茅. 以藏以修, 雲霞之交. - 舍西橫翠麓, 蕭灑可幽貞. 二仲豈無有, 愧余非蔣卿. 「서록」 - 푸르른 서록(西麓), 띠집 하나 지을 만하다. 거기에 몸을 감추고 몸을 닦자니, 구름과 안개가 어우러진다. - 집 서쪽에 푸른 산기슭이 비껴 있으니, 소슬하기 그윽이 지낼 만하다. 이중(二仲)이야 어찌 없으랴마는, 장경(蔣卿)이 아님이 부끄럽구나. 南沜 - 石之揭揭, 樾之陰陰. 于江之沜, 納涼蕭森. - 異石當山口, 傍邊澗入江. 我時來盥濯, 淸樾興難雙. 「남반」 - 돌은 우뚝하고, 숲이 우거졌다. 강가의 언덕, 시원스레 바람을 쏘인다. - 이상한 돌들이 산 어귀에 맞닿아 있고, 곁으로는 시냇물이 강으로 든다. 때로 가서 얼굴 씻으니, 맑은 숲, 흥취가 짝이 없구나. 翠微 - 翠微翠微, 書堂之東. 九日故事, 感慨余衷. - 東隴上翠微, 九日攜壺酒. 卻勝陶淵明, 菊花空滿手. 「취미」 - 푸른 산 기운, 푸른 산 기운, 서당의 동쪽이다. 중구일(重九日)의 고사(故事), 내 마음을 느껍게 한다. - 동쪽 언덕으로 취미에 오르며, 구월 구일이라, 술병을 들었다. 도연명보다 낫거니, 헛되이 국화만 손에 가득했었지. 寥朗 - 寥朗寥朗, 精舍之西. 仰眺俯瞰, 孰知其倪. - 西隴上寥朗, 矯首望烟霞. 安得陵八表, 仍尋羽人家. 「요랑」 - 탁 트여 맑은 곳, 탁 트여 맑은 곳, 정사의 서쪽이다. 우러러 보고 굽어다 보거니, 누가 그 끝을 알랴? - 서쪽 언덕 탁 트여 맑은 곳, 머리 들어 안개와 노을을 본다. 어찌하면 팔표(八表) 밖으로 날아, 우인(羽人)의 집을 찾을꼬? 釣磯 - 臨江苔石, 一絲颺風. 貪餌則懸, 冒利則訌. - 弄晩竿仍裊, 來多石亦溫. 魚穿靑柳線, 蓑帶綠烟痕. 「조기」 - 강가의 이끼 낀 돌들, 한 가닥 낚싯줄이 바람에 나부낀다. 미끼를 탐하면 걸려 잡히고, 이익을 바라면 서로 싸운다. - 늙도록 가지고 노니 낚싯대가 간드러지고, 자주 오니 돌도 또한 따뜻하구나. 물고기는 푸르른 버들가지로 꿰었는데, 도롱이는 푸릇한 안개를 띤다. 月艇 - 一葉小艇, 滿載風月. 懷人不見, 我心靡歇. - 寒潭如域鏡, 乘月弄扁舟. 九曲羊裘詠, 黃岡桂棹秋. 「월정」 - 한 조각 작은 배, 풍월을 가득 실었다. 그리운 사람은 보이지 않고, 내 마음 시름만 그지없구나. - 차가운 못이 닦아 놓은 거울과 같으며, 달을 싣고 조각배를 가지고 논다. 호로(湖老)가 읊었던 안개 낀 물결, 파선(坡仙)의 계수나무 노 젖던 가을. 櫟遷 - 櫟之不材, 多至壽老. 厥或不免, 乃壽之道. - 緣崖路呼遷, 其上多樹櫟. 何妨抱離奇, 壽已過數百. 「역천」 - 떡갈나무는 재목이 되지 못하여, 흔히 늙도록 목숨을 누린다. 재목이 되지 못함을 면하지 못하는 것, 이것이 곧 목숨을 누리는 길이다. - 벼랑을 따라 오르는 길을 천(遷)이라 부르는데, 그 위에 떡갈나무가 많다. 울퉁불퉁 괴상하게 생긴 것이야 어떠랴? 목숨이 이미 수백 년을 지냈다. 漆園 - 漆有世用, 其割焉保. 厥或免割, 乃割之道. - 古縣但遺基, 漆林官所植. 見割有警言, 蒙莊亦高識. 「칠원」 - 칠(漆)이 세상에 쓰이게 되매, 베임에 어찌 몸을 보전하랴? 베임을 면하는 것이 곧 베이게 되는 길이다. - 옛 고을이 터만 남으니, 옻나무 숲은 관가에서 심은 바이다. 베임을 당한다고 깨우치는 말을 했으니, 장자도 또한 식견이 높구나. 魚梁 - 丙穴底貢, 編木如山. 每夏秋交, 我屛溪間. - 玉食須珍異, 銀脣合進供. 峨峨梁截斷, 濊濊罟施重. 「어량」 - 병혈(丙穴) 공납(貢納)을 한다고, 편목(編木)이 산더미 같다. 언제나 여름과 가을이 바뀌는 즈음, 나는 시내 쪽을 가로막아 놓는다. - 옥식(玉食)은 진미(珍味)가 있어야 하니, 은어(銀魚)는 진상(進上)에 마땅한 것이다. 높직이 어량(魚梁)이 물을 가로질렀고, 겹겹으로 그물을 쳐 두었다. 漁村 - 太平烟火, 宜仁之村. 漁以代徭, 式飽且溫. - 隔岸民風古, 臨江樂事多. 斜陽如畫裏, 收網得銀梭. 「어촌」 - 태평한 세월, 의인(宜仁)의 마을. 물고기 잡이로 요역(徭役)을 대신하니,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지낸다. - 벼랑 저쪽 마을 민풍(民風)이 예스럽고, 강가에 즐거운 일이 많다. 비낀 노을 그림 같은 속, 그물을 거두어 은어를 잡는다. 烟林 - 吟不盡興, 畫不盡變. 春濃繡錯, 秋老霞 현. - 遠近勢周遭, 漠漠迷烟樹. 延望足玩心, 變態多朝暮. 「연림」 - 읊조려도 흥취를 다할 수 없고, 그려도 변화하는 경치를 다 그리지 못한다. 봄이 무르익을 때는 비단무늬가 얽히고, 가을이 저물어 갈 때는 붉은 노을이 무늬를 이룬다. - 멀고 가까운 곳이 두루 이르고, 안개 낀 나무는 아득하다. 머리를 끌어 즐길 만하니, 변화하는 자태가 조석(朝夕)으로 다르다. 雪徑 - 皓皓崖壑, 迢迢磴徑. 踏作瑤迹, 誰先乘興. - 一徑傍江潯, 高低斷復遶. 積雪無人蹤, 僧來自雲表. 「설경」 - 하얀 벼랑과 계곡, 아득한 비탈길이다. 눈을 밟으매 옥의 자취가 되니, 누가 먼저 흥을 타는지? - 오솔길 하나 시내를 끼고, 높았다, 낮았다, 끊겼다, 다시 잇는다. 쌓인 눈에 사람 자취 없는데, 흰 구름 밖에서 중이 걸어 나온다. 鷗渚 - 舞而不下, 渠未可干. 狎而有盟, 吾何敢寒. - 浩蕩浮還沒, 毰毸晒復眠. 閑情乃如許, 機事定無緣. 「구저」 - 춤을 추되 내리지 않으니, 저들을 간섭할 수 없구나. 가까이 하자던 맹세가 있거니, 내 어찌 감히 그를 저버리랴? - 넓은 물결에 뗬다가는 다시 잠기고, 날개 털고 햇볕 쬐다 다시 잠든다. 한가한 정취가 이러하거니, 세상사, 얽혀질 까닭이 없겠다. 鶴汀 - 鳴皐聞天, 掠舟驚夢. 野田有侶, 盍愼媒弄. - 水鶴烟霄下, 晴沙立遠汀. 那能無飮啄, 得處莫留停. 「학정」 - 구고(九臯)에 울어서 하늘에 들리고, 배에 스쳐서 꿈을 깨인다. 들판에 짝이 있으니, 어찌 섞여서 희롱하기를 조심하지 않으랴? - 물가의 학, 안개 낀 하늘 아래, 비 갠 모래밭 먼 모래톱에 섰다. 어찌 먹지 않으랴마는, 먹이를 얻었던 곳에 머물지는 말지다. 江寺 - 江上招提, 老仙舊居. 月寒庭蕪, 風悲室虛. - 古寺江岸空, 仙遊杳方丈. 蟠桃定何時, 結子重來賞. 「강사」 - 강 위의 절은 늙은 신선의 옛 거처이다. 달빛은 차갑고 뜰은 묵었으며, 바람소리는 슬프고 방은 비었다. - 옛 절이 강 언덕에 비어 있으니, 신선의 놀던 것 방장(方丈)에 아득하다. 반도(蟠桃)는 어느 적 것인가? 열매를 맺으면 다시 와서 보련다. 官亭 - 官作之亭, 歲月茫茫. 樂匪知濠, 擧似如棠. - 小亭境自佳, 後江前皐隰. 皁蓋不來時, 野禽自栖集. 「관정」 - 관가에서 지은 정자, 세월이 아득하다. 호(濠)의 즐거움은 알지 못하되, 몸짓은 당(棠)에 가서 물고기를 보는 듯싶다. - 작은 정자 경계가 절로 좋으니, 뒤로는 강이요, 앞으로는 언덕이다. 검은 일산(日傘), 다시 오지 않을 때, 들새만 절로 나든다. 長郊 - 郊原膴膴, 籬落依依. 戴星而出, 帶月而歸. - 炎天彌翠浪, 商節滿黃雲. 薄暮歸鴉望, 遙風牧笛聞. 「장교」 - 들은 평평하고, 인가(人家)는 즐비하다. 별을 보고 나갔다가, 달을 보고 돌아온다. - 여름에는 푸르른 물결 가득하고, 가을에는 누른 구름 가득하다. 저물녘에 돌아가는 갈가마귀를 바라보는데, 먼 바람에 목적(牧笛)이 들린다. 遠岫 - 如黛如簪, 非烟非雲. 入夢靡遮, 上屛何分. - 微茫常對席, 縹緲定何州. 雨暗愁無奈, 天空意轉悠. 「원수」 - 눈썹만 같은가 하면 비녀도 같고, 안개도 아니고 구름도 아니다. 꿈결에 드는 것을 막을 수 없고, 병풍에 올리니 분별할 수 없구나. - 아련히 언제나 자리에 마주하고 있는 듯, 어느 고을이기에 아물거리나? 비로 어둑하여 시름을 어쩔 수 없고, 하늘가에 마음 더욱 아득하다. 土城 - 維彼南山, 因山作城. 海桑一朝, 蠻觸何爭. - 禦難何代人, 古籍莽難考. 時平久已頹, 兔穴深蔓草. 「토성」 - 저쪽의 남산, 산을 말미암아 성을 지었다. 바다가 뽕나무밭 되기도 하루아침 일인데, 만(蠻)과 촉(觸)은 어찌 다투나? - 난국(難局)을 막은 것은 어느 시대 사람인가? 고적(古籍)이 없어 상고(詳考)하지 못한다. 시절이 태평하여 무너진 지 오래이니, 토끼 굴에 풀들이 우거졌구나. 校洞 - 古縣鄕校, 遺址宛然. 麗季孱王, 敎化無傳. - 宮牆沒澗烟, 絃誦變山鳥. 誰能起廢規, 張皇道幽眇. 「교동」 - 옛 고을의 향교, 남은 터가 뚜렷하다. 고려(高麗) 말년 쇠하던 때의 일이니, 교화(敎化)가 전함이 없다. - 궁장(宮墻)은 시냇가 안개 속에 묻혔고, 거문고 소리, 글 읽는 소리, 산새 소리로 바뀌었다. 뉘라서 무너진 규모(規模)를 일으켜, 그윽하고 아득한 묘리(妙理)를 장황히 말할꼬? [ 五言絶句 別錄 4首 ] 聾巖 - 以下四絶所詠, 皆天淵所望. 然皆有主, 故不係陶山, 而別錄于下, 亦山谷所謂借景之義. - - 在西翠屛東. 故知中樞李先生亭館在其傍. - 西望巖崖勝, 高亭勢欲飛. 風流那復覩, 山仰只今稀. 「농암」 - 아래의 절구 네 수를 읊은 바는 모두 천연대에서 바라보이는 곳이다. 그러나 다 주인이 있는 까닭에 도산에 연계되지 아니하여 아래에 따로 적으니, 옛날 황산곡(黃山谷)의 이른바 “경치를 빌린다.”는 것이다. - - 서취병 동쪽에 있다. 지중추(知中樞) 이(李) 선생의 정관(亭館)이 그 곁에 있다. - 서쪽으로 바위 벼랑 뛰어난 곳을 바라보매, 드높은 정자의 기세가 날 듯하다. 풍류를 어찌 다시 보리? 산처럼 우러름도 이제 드물다. 汾川 - 在西翠屛南, 實里名也. 知事之胤大成所居. 大成號碧梧. - 汾川非異水, 回首想梧陰. 摵摵鳴疎雨, 秋來戀主深. 「분천」 - 서취병 남쪽에 있는데, 사실은 마을 이름이다. 지사(知事)의 아들 대성(大成)이 사는 곳이다. 대성의 호는 벽오(碧梧)이다. - 분천은 다른 물이 아니매, 머리를 돌려 오동나무 그늘을 생각한다. 우두둑 성긴 비에 울리니, 가을이 들어 님 그리움 깊구나. 賀淵 - 在西翠屛下. 承旨李公幹亭舍在其上. - 激湍下爲淵, 深處知幾丈. 主人在銀臺, 烟波頻夢想. 「하연」 - 서취병 아래에 있다. 승지(承旨) 이간(李幹)의 정자가 그 위에 있다. - 급한 물결이 떨어져 못이 이루되, 깊은 곳은 몇 길이나 되는지. 주인이 은대(銀臺)에 있으니, 안개 낀 물결이 꿈에 자주 들겠다. 屛庵 - 在西翠屛崖壁中. 上舍李大用所構, 命僧守之. 舊有淨室, 近聞守僧改置其室, 殊失佳致云. - 屛庵在懸崖, 石縫泉氷齒. 舊愛一室明, 如今定何似. 「병암」 - 서취병의 절벽 가운데 있다. 상사(上舍) 이대용(李大用)이 세운 것인데, 중을 시켜 지키게 했다. 옛날에는 깨끗한 방이 있었으나, 근래에 듣기로는 지키던 중이 그 방을 고치는 바람에 아름다운 풍치를 잃었다고 이른다. - 병암은 높은 벼랑 위에 있으니, 돌 틈에서 나는 샘물은 이가 시리다. 옛날에는 깨끗한 방이 좋았는데, 이제는 어찌 되었나? [ 跋文 1篇 ] 右陶山記文一篇, 及逐處記事七言十八絶, 又五言雜詠二十六絶, 別錄四絶, 倂有題識, 皆先生所手寫, 間有塗改處, 蓋初間草本也. 余友金君就礪, 嘗遊先生之門, 得此本以歸, 重之不啻如南金和璞, 裝繕作帖, 以爲寶玩. 余嘗從金君借而玩之, 金君要余出數語跋其後. 余謹已諾之, 而風埃逆旅, 卒卒無須臾間, 固未遑於把筆抒思. 今者解官歸鄕, 幸無事, 時時披閱吟諷, 於先生之微意, 或有窺得其一二. 伏想先生當此之時, 閒居彌久, 其所自樂, 必有深於前日者, 恨不得操几杖, 從遊於堂壇巖臺之間, 而面承提誨也. 山川間之, 奉拜靡由, 東望飛雲, 每不覺神魂之馳遡焉. 金君又嘗要余和帖中諸詩, 余雖不敢輕諾, 而心亦許之. 玆於閒中, 輒復仰步七言十八首, 倂寫之帖末, 庶幾少見區區之意, 非敢以爲有所助發也. 蓋欲以求正于金君, 而仰質於先生云爾. 時隆慶四年庚午之歲五月日, 後學高峯奇大升端拜謹書. 도산기문(陶山記文) 1편, 곳에 따라 일을 적은 칠언절구(七言絶句) 18수, 또 오언절구(五言絶句) 잡영(雜詠) 26수, 별록(別錄) 4수는 제지(題識)가 아울러 있는데, 모두가 선생이 손수 적은 것으로서, 사이에 고친 흔적이 있으니, 처음에 이루어진 초본(草本)이다. 나의 벗 김취려(金就礪)가 일찍이 선생의 문하에 노닐다 이 초본을 얻어 가지고 왔는데, 소중히 다루기를 마치 남금(南金)이나 화박(和璞)과도 같이 하는 뿐만 아니라 선장(線裝)하여 첩자(帖子)로 만들어 가지고 보배를 만지며 즐기는 듯했다. 내가 일찍이 김군에게서 이것을 빌어다 즐기어 보는데, 김군은 나에게 그 끝에 몇 마디 발문(跋文)을 내어 달라고 바랐다. 나는 삼가 승낙은 했지만, 풍진(風塵)에 떠돌다 보니 바빠서 조금도 한가로운 때가 없으매, 참으로 붓을 잡고 생각을 펴낼 만한 겨를이 없었다. 이제 벼슬을 풀어 제치고 고향에 돌아와 있고, 다행히 아무 일도 없으매, 때때로 열어 보고 읊조리는 가운데, 선생의 은미한 뜻을 한두 가지 알아듣는 것이 있었다. 생각해 보건대, 선생은 이 때에 오랫동안 한가로이 계시던 터이니, 스스로 즐기신 바가 반드시 전일보다 훨씬 깊었을 것인데, 선생을 가까이 모시고 당(堂)ㆍ단(壇)ㆍ암(巖)ㆍ대(臺) 사이에 좇아 노닐면서 얼굴을 마주한 채로 가르침을 받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산천이 가로막아 선생을 배알할 길이 없으매, 동쪽으로 뜬 구름을 바라보건댄 언제나 문득 마음이 거기로 달려가고는 하였다. 김군은 또 일찍이 나에게 그 첩자 속에 들어 있는 여러 시(詩)에 화운(和韻)하여 달라고 바라기도 했는데, 나는 비록 감히 가벼이 승낙하지는 못했지만, 마음으로는 또한 허락했었다. 그래서 이에 한가로운 겨를에 다시 칠언(七言) 18수를 우러러 화운하고, 아울러 첩자의 말미에 적으니, 거의 자잘한 뜻을 조금 나타낸 것이지, 감히 선생이 시에서 나타낸 뜻을 도와 밝혀낸 것은 아니다. 이로써 김군에게 바로잡아 주기를 바라고, 선생께 우러러 고쳐 주기를 바라는 뿐이다. 융경(隆慶) 4년 경오(庚午, 1570) 5월 일, 후학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은 깍듯이 절하고 삼가 적는다. [ 七言絶句 和韻 18首 ] 容膝堂成審易安, 陶匏登案足怡顔. 優游卒歲知何事, 象在方圓水在槃. - 又陶山書堂 - 겨우 무릎이나 움직일 만한 집이지만 편안히 여기고, 질그릇과 바가지가 밥상에 오르되 그저 기쁜 낯이라. 느긋이 지내면서 삶을 마치자니 그밖에 무슨 일을 아리요? 상(象)은 방원(方圓)에 있거니, 물은 고반(考槃)에 있어라. - 「도산서당」 - 收身非欲慕逃虛, 勵志唯應冀復初. 緬想前修心炯炯, 一軒棲息俗緣疏. - 巖棲軒 - 몸을 거둠은 허무(虛無)를 그리는 까닭이 아니고, 뜻을 닦음은 시초(始初)를 회복하려는 것이다. 전현(前賢)의 밝고 밝은 마음을 상상해 보건대, 한 칸 집에 깃들이매 속연(俗緣) 멀어라. - 「암서헌」 - 涵養宜加靜裏功, 推行還覺動時通. 須探敬義循環妙, 方信曾思立敎同. - 玩樂齋 - 함양(涵養)은 정(靜)한 동안의 공부를 더해야 하고, 추행(推行)은 다시 동(動)하는 때의 소통을 깨달아야 한다. 경(敬)과 의(義)의 돌고 도는 묘리(妙理)를 찾을 양이면, 증자(曾子)와 자사(子思)의 가르침이 같음을 바야흐로 알리라. - 「완락재」 - 卜築何須强灼龜, 江潭延徑入柴扉. 幽人恰有潛心地, 貞吉從敎履道夷. - 幽貞門 - 깃들일 곳 마련함에 어찌 굳이 점치랴? 강에서 이어진 길 사립으로 들어간다. 그윽이 사는 사람 잠심(潛心)할 터 가지니, 정길(貞吉)한 덕(德)으로 도(道)의 평이(平易)한 것을 밟아나간다. - 「유정문」 - 淤泥不染解全天, 濯濯明姿更可憐. 想得無言相對處, 一團淸興爲君偏. - 淨友塘 - 진흙에 물들지 않아 온전한 천성(天性)을 지니되, 깨끗하고 맑은 자태가 더욱 가련하구나. 말없이 서로 마주하던 데서 생각해 보건댄, 한낱 맑은 흥취라고만 하면 그대에게는 치우친 말이다. - 「정우당」 - 壇徑栽培一對三, 竹松梅菊便相參. 風霜雨露殊榮落, 造化微機幸自諳. - 節友社 - 단(壇)으로 난 길에 하나가 셋을 마주하도록 심어 기르니, 대나무, 소나무, 매화, 국화가 문득 서로 잇닿았다. 바람, 서리, 비, 이슬에 피고 짐이 저마다 다르지만, 조화의 미묘한 천기(天機)는 절로들 아는구나. - 「절우사」 - 藹藹山頭幾片雲, 每當怡悅輒思君. 也知此物難持贈, 脈脈幽懷自十分. - 隴雲精舍 - 수풀 우거진 산머리에 몇 조각 구름, 언제나 즐거이 마주하되 문득 그대를 생각한다. 이것은 가져다주기 어려운 줄 아노니, 끊임없는 그윽한 그리움 저절로 가득하다. - 「농운정사」 - 學習如何取數飛, 操存思索諒無時. 須敎浹洽中心悅, 未必撑眉獨解頤. - 時習齋 - 배우고 익히기 어찌 새의 날갯짓에 비기나? 조존(操存)과 사색(思索)에 참으로 끊이는 때가 없어라. 흐뭇하게 젖어들어 속마음이 기쁘도록 해야 할 것이니, 반드시 눈썹을 치켜드는 것만이 기쁜 웃음은 아니다. - 「시습재」 - 父生師敎食於君, 老少相隨友與羣. 禮有往來情更洽, 講求寧復狼云云. - 止宿寮 - 부모가 낳고, 스승이 가르치고, 임금의 밥을 먹으니, 늙은이와 젊은이가 서로 벗과 무리를 따른다. 예절에 오고감이 있어야 정도 흡족하게 되니, 강구(講求)하여 얻어야 함을 어찌 터무니없이 말하랴? - 「지숙료」 - 盈科行險事如何, 志道成章足歎嗟. 寓目急湍知有本, 仰欽先哲起人多. - 觀瀾軒 - 파인 곳을 채우고 험한 곳을 지나는 일이 어떠하던가? 도에 뜻을 두고 문장을 이루니 참으로 감탄스럽다. 여울을 보건댄 근원이 있음을 알게 되나니, 선철(先哲)이 사람의 마음을 일으킴을 우러러 공경한다. - 「관란헌」 - 堂舍粗成谷口雲, 更開蘭徑接山門. 耕巖名震元非慕, 出入無虞却可論. - 谷口巖 - 곡구(谷口)의 구름 속에 집을 얼추 지어 두고, 난초 길 다시 열어 산문(山門)에 이었다. 산간에 밭을 갈되, 이름을 떨침은 본디 바라지 않거니, 나고 듦에 근심이 없음을 의논할 만하다. - 「곡구암」 - 鳶魚非但指爲然, 仰有靑天俯有淵. 偶上小臺情境妙, 向來辛苦對陳編. - 天淵臺 - 솔개와 물고기는 다만 그것뿐이 아니니, 우러러 보건댄 하늘이 있고 굽어보건댄 못이 있구나. 우연히 조그만 대에 오르매 정경(情境)이 묘하거니, 지난날에는 괴로이 책만 마주하고 있었다. - 「천연대」 - 滄波凝湛寫天光, 何似當年半畝塘. 固是靜深含萬象, 誰知溥博發源長. - 天光雲影臺 - 푸른 물결 맑게 어려 하늘빛 비치니, 당년의 반 이랑 못과 비슷하지 않은가? 참으로 고요하고 깊어서 만상(萬象)을 머금거니, 뉘라서 두루 미치는 발원(發源)의 긺을 알랴? - 「천광운영대」 - 潭上行吟怳醉醒, 潛思明訓意無寧. 縱然自取由淸濁, 今日眞堪濯我纓. - 濯纓潭 - 못가를 거닐며 읊거니와, 하물며 취하고 깨는 일이랴? 밝은 가르침 곰곰이 생각자니 뜻이 편안할 날 없구나. 맑고 흐림을 스스로 취할 양이면, 오늘은 참으로 내 갓끈을 씻을 만하다. - 「탁영담」 - 金土淪精妙結形, 隨波隱見理難明. 狂瀾盪擊終無奈, 天許孤根老不傾. - 盤陀石 - 금(金)과 토(土)의 정기로 형체를 묘하게 맺으니, 물결 따라 보일락 말락, 이치를 밝히기 어렵다. 거센 물결도 끝내 어찌할 수 없으니, 하늘이 외로운 뿌리를 늙도록 기울지 않게 하였다. - 「반타석」 - 濃淡山光倚畫屛, 煙雲變化任縱橫. 不應卷石能成大, 自是天機有廣生. - 東翠屛山 - 짙고 묽은 산 빛이 그림 같은 병풍에 기대고, 안개와 구름의 변화가 가로 세로 걸친다. 한 줌 돌이 크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천기에 광생(廣生)의 이치가 있는 까닭이다. - 「동취병산」 - 偃蹇逍遙萬古屛, 淡煙斜日見林亭. 秋霜刻轢氷埋覆, 忽地春回不改靑. - 西翠屛山 - 만고 병풍에 마음껏 노닐매, 묽은 안개, 비낀 노을이 숲 속 정자에 비친다. 가을 서리 썰렁하고 얼음까지 덮였다가, 문득 봄이 오면 다시 푸르다. - 「서취병산」 - 山形非必似花形, 深秀猶堪當美名. 更有幽人葆馨德, 一般佳趣類天成. - 芙蓉峯 - 산 모양이 반드시 꽃 모양일 것은 아니나, 빼어남이 오히려 아름다운 이름을 얻을 만하다. 다시 그윽이 사는 사람의 짙도록 향기로운 덕이 있으니, 한 가지로 좋은 흥취를 절로 이룬 듯하다. - 「부용봉」 - [ 後序 18首 ] 余旣爲此詩, 欲以呈稟先生, 未敢遽寫諸帖, 懶慢因循, 忽遭山頹之慟. 撫玩遺帖, 益增悲惋. 今適入都, 見金君, 相與道舊摧咽, 遂出此帖, 書以歸之. 抑鄙言雖淺, 而亦有意思, 如使九原可作, 先生必以爲相悉者矣. 嗚呼, 悕矣. 壬申五月日, 奇大升書于漢城終南之寓舍. 내가 이 시를 이미 다 지어 놓고 선생께 올리려 했으나, 감히 아직 미처 첩자에 베껴 적지 못하고 게을리 있다가, 갑자기 산이 무너지는 아픔을 만났다. 유첩(遺帖)을 어루만지니, 슬픔이 더했다. 이제 마침 도성(都城)에 들어와, 김군을 만나 서로 옛일을 이야기하며 흐느끼고, 드디어 이 첩자를 꺼내어 놓고 적어서 돌려준다. 비루한 말이라 뜻이 비록 얕기는 하지만, 또한 생각은 들어 있으니, 만약에 구원(九原)에 계시기로 한다면, 선생은 반드시 ‘서로가 서로를 알았다.’고 하실 것이다. 아아, 슬프다. 임신(壬申, 1572) 5월 일, 기대승은 한성(漢城) 종남산(終南山) 우사(寓舍)에서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