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륭사십일년병신칠월일 영종대왕실록청의궤(乾隆四十一年丙申七月日英宗大王實錄廳儀軌 解題)

G002+AKS-AA55_23772_000
해제작성오항녕(吳恒寧)
작성일
내용시대1781
언어국한문 혼용
간행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초록

[정의]

1778年(正祖2)부터 1780年까지 있었던 『英祖實錄』의 편찬과정과 참여인원, 소요물품 등을 기록한 의궤.

[서지사항]

규장각에 3건(奎14171, 奎14172, 奎14173)이 더 전한다.
분권하지 않고 2冊으로 작성되었지만 표제에는 편의상 상, 하의 冊次를 기록해 두고있다. 魚尾의 위치 등 판형이 다른 것도 포함되어 있다. 현재의 『英祖實錄』은 1889年(高宗26)에 英宗을 英祖로 추존하면서 달리 부르게 된 것이다. 의궤 처음에 ‘乾隆 四十一年 七月 日’이라고 쓰여 있는데, 이는 처음 『英祖實錄』 편찬 논의가 시작된 시점을 말하는 것이지, 의궤를 필사한 시점은 아니다.

[체재 및 내용]

내용은 刪節廳謄錄·實錄廳事目·實錄纂修廳謄錄·改纂修謄錄·校正廳謄錄·校讎廳謄錄·摠裁官纂修校正校讎堂上郎廳並錄·印役工匠 및 諸具·移文秩·甘結秩·來關秩·各房謄錄·別工作謄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1777年(正祖元年) 5월 金尙喆을 實錄廳 摠裁官으로 삼았지만 막상 실록청이 개설된 것은 이듬해 2월에 이르러서였다.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景宗實錄 수정이 문제되었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실록의 편찬자료에 대한 견해를 놓고 논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景宗實錄은 英祖實錄 편찬과 함께 수정작업을 진행하도록 하였다. 한편, 실록 편찬의 주된 자료에 대한 논란은 문제가 심각하였다. 발단은, 김상철이 承政院日記를 참고로 실록편찬을 하겠다고 하자, 兵曹判書 蔡濟恭이 ‘포쇄관으로 있을 때 시정기를 보았는데, 승정원일기만 못하였다’하고 또 “肅廟實錄을 본 적이 있는데 한 사람의 論斷이 일관되지 않았다. 是非가 공평하지 않은 것이 이와 같으니, 믿을만한 역사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첨언하였다. 이로 인하여 정조가 실록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논란이 시작되었다. 한편 史官인 待敎 林錫喆, 檢閱 金勉柱가 채제공을 정면에서 비판하고 나섰다. 사관의 기록을 믿을 수 없다는 말은 곧 실록편찬의 근저를 흔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채제공은 從重推考, 削職되었으며, 임석철과 김면주도 삭직되었다. 이는 英祖17年 翰林自薦制를 당론의 온상으로 보아, 자천제가 아닌 圈點에 의하여 선발하게 될 때 이미 실록의 일차 자료가 되는 사초의 신뢰도는 손상받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연장에서 한림의 사초보다 『承政院日記』가 더 풍부하고 정확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인식을 갖게 되었고, 이후 정조가 실록을 부정하지는 않았지만 실제로는 『日省錄』 편찬에 힘을 쏟게 되고 『日省錄』에 사실상의 ‘國史’의 지위를 인정하게 되는 일련의 흐름이 이해될 수 있다. 정조 이후 일성록의 공정성에 대해서는 별도의 연구가 있어야 하지만, 적어도 정조 이후 실록에서 일성록으로 조선의 국사 편찬 시스템이 전환되고 있었던 점은 매우 중요한 사회변화의 역사적 반영이라고 생각된다.
1777年에도 都廳 및 각방 당상을 임명하고 工曹와 司譯院에 실록청을 둔다는 등의 實錄廳事目 7개항을 정하였다. 한편, 1778年 2월 實錄廳을 설치한 뒤, 정조는 ‘實錄도 歷史의 명칭이고 春秋도 또한 역사의 명칭인데, (둘의 직명이 따로 있어서) 官制가 거칠게 보이고 官名이 重疊된다’고 하여, 그 직명을 2품 이상은 知實錄事·同知實錄事라 하고, 3품 이하의 實錄修撰·實錄編修 등의 관원은 品階 임명하는 것을 定式으로 삼았다. 찬수범례는 14개조로 이전의 그것과 동일하다.
찬수가 끝난 1780年(正祖4) 4월에 校正廳을 두어 교정 작업을 시작하였으며, 이와 함께 분판郎廳을 두어 刊行에 대비하였다. 이듬해 7월에 英祖실록이 완성됨과 동시에 儀軌事目 7개항을 정하여 의궤를 정리하였다. 총재관 이하 堂上郎廳仕日別單에는 재임일수가, 員役에는 書吏 이하 편찬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작성되어 있다.
下冊에는 각 堂上郎廳의 재임시기 및 移文·甘結·來關 및 各房의 謄錄이 실려 있는데, 各房 別 郎廳의 취임일자 및 재임기간이 따로 적혀있다. 권말에는 儀軌堂郞으로, 總裁官 鄭存謙 등 4인의 명단이 첨부되어 있다.

[자료적 특성 및 가치]

이 英祖實錄儀軌는 英祖實錄이 景宗實錄의 수정과 함께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 자체의 사료가치와 함께 매우 빈약한 『景宗修正實錄儀軌』를 보완할 수 있는 부가적 가치도 지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