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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G002+AKS-AA55_20664_000 |
해제작성 | 강제훈(姜制勳) |
작성일 | 2005-07-24 |
내용시대 | |
언어 | |
간행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
초록 | 조선 22대 국왕 正祖의 후궁인 元嬪의 일생을 정리한 行狀. |
조선 22대 국왕 正祖의 후궁인 元嬪의 일생을 정리한 行狀. |
필사본으로 행장의 내용은 13장이며, 끈으로 묶어 장정하였다. 각 장은 10행, 한 행은 23자이다. 크기는 29.3×20cm이며, 공식적인 작성자는 正祖다. 본 문의 첫머리에 藏書閣印이 날인되어 있다. |
표제는 『仁淑元嬪行狀』이고, 본문 시작 부분에는 ‘御製’ 두 글자가 첨부되어 있다. 본관과 父에서 高祖에 이르는 四祖母를 밝히는 대목은 한 글자를 낮추고, 행을 달리하여 기록하였다. 국왕의 모후와 대비에 대해 언급하는 경우에는 한 글자를 띄어 隔字하였다. 필자는 予라는 일인칭 표현을 사용하여 행장을 서술하였다. 본문 중에는 우측에 가는 붓으로 수정 사항이나 보충할 내용이 표시되어 있기도 하고, 元嬪의 무덤 이름과 宮號는 빈 칸으로 처리되어 있다. 행장은 四祖에 대한 언급에 이어, 元嬪이 洪樂春의 딸로 당대의 실력자 洪國榮 집안 출신임을 밝히고 있다. 집안의 내력에 이어 태몽의 내용과 어린 시절 주위의 시선을 끌었던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궁에 간택되어 들어온 경위를 언급하면서, 주위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사실을 언급하였고, 일 년 남짓한 궁궐 생활에서 宮人들에 휘둘리지 않고 단정한 몸가짐과 반듯한 처신으로 위엄과 정숙함을 드러냈다고 했다. 위로 국왕 자신의 어머니와 대비에 대해 예를 온전하게 갖추었으며, 事親에 대해서도 효를 다한 것으로 적고 있다. 특히 정조 생모와의 각별한 정을 생모의 말을 인용하는 형식으로 길게 서술하고 있다. 마지막 부분에는 국왕이 빈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심정을 적고, 빈의 성품을 드러내기 위해 행장을 짓는다는 경위를 서술하였다. |
元嬪(1766~1779)은 홍국영의 여동생으로 이른바 홍국영 세도의 분수령이 되었던 인물이다. 원빈이 14세의 어린 나이로 입궁 후 일 년 남짓한 시점에서 사망함으로써 누이동생을 통해 정조의 후사를 잇고 강력한 외척의 지위를 얻으려던 홍국영의 의도는 좌절되었다. 원빈이 사망한 같은 해에 홍국영은 실각하여 역대 최연소의 奉朝賀로 임명되게 된다. 원빈의 무덤은 사망 당시 仁明園으로 격을 한껏 높였으나, 홍국영이 실각한 후 후사가 없는 후궁에 대한 지나친 존중이란 비판을 받고 정조 10년 결국 묘로 강등되었고, 여러 차례 이장된 후 지금은 서삼릉에 자리잡고 있다. 본 기록은 御製 형식을 갖추고 있으나 정확한 서술 경위를 알 수는 없다. 사망 당시 원빈의 무덤에 대해서는 仁明으로 園號가 결정되었는데, 본 기록에서는 墓號라 서술하고 빈 칸으로 처리되어 있다. 홍국영의 관직이 빈 칸으로 처리되어 있어 정확하지 않으며, 여러 군데 수정 사항이 표시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작성 시점과 자료의 성격을 정확히 알 수 없다. 이러한 의문점에도 불구하고, 藏書閣印이 날인된 자료로서 일관되게 1인칭 予를 사용하고 있고, 할아버지인 영조에 대해서 英考라는 正祖 특유의 표현을 쓰고 있는 점 등에서 御製의 행장인 것은 분명하다. 국왕이 후궁의 行狀을 작성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정조의 문집인 『弘齋全書』에 본 행장은 수록되어 있지 않으며, 다른 기록에서도 실체가 확인되지 않는다. 정조를 작성자로 하는 후궁 元嬪을 위한 행장은 본 기록이 유일한 것으로 판단된다. 실록에 수록된 정조의 생모인 혜경궁 홍씨에 대한 행장에서, 원빈에 대한 각별한 情誼를 지녔던 혐의가 있으나 사실이 아니라 강조된 대목이 있다. 정조 생모인 혜경궁 홍씨가 元嬪에 대해 각별한 情誼를 나타냈다는 정황은 본 기록에서 소상히 밝혀져 있다. 본 행장은 실록의 혜경궁 행장에 언급된 혐의의 구체적인 내용이 되는 셈이다. |
元嬪의 어제 행장은 본 자료가 유일본이다. 장서각에 마이크로필름 촬영본(MF35-1893)이 있다. |
『정조실록』. 『조선시대당쟁사 2』 (이성무, 동방미디어, 20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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